“……조카입니다. 아리는.”
“네…….”
‘아까 분명히 통화는 아저씨라고 한 거 같은데, 뭔가가 있어. 분명히.’

언제나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병동 응급실에 교통사고를 당한 젊은 한 남자가 911대원들에게 실려 왔다. 남자의 몰골에 교통사고가 얼마나 끔찍하게 일어났는지 으레 짐작가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남자의 옷을 간호사들이 달라붙어 가위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지만 구릿빛이 도는 건장한 사내였다. 머리를 다쳤는지 붕대로 싸맨 머리에선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의사들이 상태를 점검하고는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 장장10시간의 기나긴 수술을 마치고 사내는 1인실 특급 병실로 옮기어졌다.
“으, 으…….”
마취가 깨어나는지 사내는 꿈틀거리며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사내의 주변을 맴돌던 노인 한 명과 젊은 남자는 침대에서 고통스럽게 움직이는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수야, 수야, 이제 정신이 드느냐? 어디 정신 좀 차려 보려무나.”
노인의 눈가에 애처로울 만큼 물기가 머금으며 목소리가 갈라지듯 메마른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던 수현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어 노인에게 내밀었다.
“회장님, 일단 이것으로 먼저 목 좀 축이시지요?”

노인은 속이 타들어 가는지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다시금 수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10시간이나 넘게 수술을 하고 나온 유일한 혈육인 자신의 아들이 지금 머리와 눈가엔 붕대로 칭칭 감기어져 있었다. 수술은 잘 끝이 났고, 이제 생명에도 지장이 없다 했지만 가슴 아프게도 앞으로는 세상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각막이 파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실명을 한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 아들인데 실명이라니. 노인은 자신의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자신의 아들의 손을 두 손 모아 잡았다.
정신이 돌아왔는지 일어나려던 수는 움직일 수 없는 고통에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도로 원상태의 모습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다. 수야.”
노인의 촉촉이 젖은 듯하면서도 메마른 목소리가 수의 귓가에 들려왔다.
“병원? 아! 사고가 났었지? 그런데 왜 이리 어두운 거예요? 제가 눈을 다쳤나요?”
“수술을 했단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다니 경과를 좀 더 지켜보자꾸나.”
자신의 입으로 아들의 실명 소식을 전할 수 없었던지 노인은 애처로운 시선으로 그저 아들의 손만 연신 쓰다듬을 뿐이었다. 강인한 체력 때문인지 눈부시도록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눈만은 회복이 되지 않고 있었다. 몸이 거의 회복된 이후에 실명했다는 소식에 수는 좌절을 하여야만 했다. 그러던 중 옆 병실에 있던 시한부 생명으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박은영 씨를 만났고, 자신의 병보다 젊은 사람이 안쓰럽다며 위로를 해주는 은영 덕분에 둘은 금세 친해져 버렸다. 박은영 씨에겐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보육원에 맡기고 미국으로 들어와서는 한 번도 찾아 가지 못했다고 한다. 가끔씩 눈물을 흘리며 어린 딸을 걱정하던 모습이 안쓰러워 나중에라도 기회가 된다면 꼭 보살펴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약속에 보답이라도 하듯 은영은 죽기 바로 직전에 자신의 눈을 수에게 주며, 자신의 어린 딸을 부탁했었다. 지금도 은영의 목소리가 수의 귓가에 빙빙 맴돌았다.
‘이름이 아리야. 박아리. 그 어린 핏덩어리를 나 살겠다고 버리고 왔어. 그런데 한순간도 그 어린 것 생각을 안 하며 살 수가 없더라고.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것도 아마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겠지. 엄마가 되어가지고 버렸으니. 흑흑흑……. 총각에게 내 눈을 줄 테니 그 아이……. 가끔 한 번씩만이라도 봐줄 수 있겠어? 지 애비가 있긴 하지만 그 애비란 작자는 그 아이가 있는 것도 몰라. 아니 모르고 있는 게 그 아이한테 오히려 좋을 수도 있지. 휴, 얼마나 예쁘게 컸을까? 나중에 그 아이 컸을 때 이 죄 많은 년은 어미 노릇은 못 했지만 지어미 얼굴은 알고 싶겠지. 아니 안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네. 내 총각에게 이러는 게 민망하기는 하지만 죄 많은 년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맘으로 이 세상 떠나게 부탁할게. 어려운 부탁인 거 알아. 하지만 부탁할게.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