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현실적인, 현실에 치여 사는 여자 이지선.
너무나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찾아 볼수 없을 것만 같은 남자 정우현.

중증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연락을 하는 오빠내외, 어렸을 적 가정파탄을 일으켜준 얼굴도 모르는 엄마라는 사람을 지닌, 타의반, 자의반 으로 바싹 말라붙은 건어물녀가 되어 버린 그녀.
야근, 특근, 외근은 다 도 맡아 하면서 곰팡이 냄새 나는 6평 원룸에 3분 카레로 한 끼를 해결하고 미니 냉장고 속의 시원한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게 유일한 낙인 그녀.
그녀의 성애 가득한 냉장고 안에는 돌돌 말린 채 바싹 말라가는 오징어포 보다 더 건조한 그녀의 삶에 나타난 그.

“......나랑 연인 사이가 되는 건 어때?”




본문 중에서

……저한테 그런 돈의 가치가 있다는 겁니까?”

“나한테는, 당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원하시는 게 뭔데요.”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신장이 필요해, 라든지 하는 말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당분간 나의 연인 역할을 해줬으면 해.”

입주 가정부가 필요하니 집을 청소해야겠어, 라든지 혹은 숨겨 놓은 딸이 있는데 과외 선생이 되어 주는 게 어때, 따위였다면 지선은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지금 말이 되는 소릴 하는 건가? 연인이라니? 저 남자는 참 말도 드라마틱하게 하는 건가. 무슨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애인 대행은 어때?” 하는 말이었으면 오히려 픽 하고 웃음을 날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늘 웃고 있는 것 같던 얼굴에는 전혀 소홀함이 없는 표정이었다. 건조한 얼굴로 연인의 역할이라니.

“하루의 생각할 기회를 주겠어. 내일 가타부타를 정해서 이야기해 주길 바래.

지선은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벗어 놓은 슈트를 검은색 가죽 소파에서 들어 올렸다. 그것으로 자신의 용건은 끝났다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연인이라니요. 무슨 뜻이죠?”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지선을 쳐다보았다.

“연인……. 뜻을 모르나? 애인? 그렇게 이야기해야 하나? 일이 끝나면 만나고, 사랑을 속삭이고, 곁에 있어서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이 서로 아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그런 역할.”

남자의 목소리는 띄엄띄엄, 마치 시낭송같이 혹은 노랫소리 같이 흘러나왔다. 너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자신에게는 물과 기름 같이 겉도는 저 이야기는 무엇인가.

“애인 대행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제가 보기엔 대표님의 그 말씀은 전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은데요.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시는 겁니까?”

보기에도 미스잖아……. 지선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이 남자 지금 사람 앞에 두고 장난 하는 거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있어. 당신이 예스를 하면 그 이유를 이야기하지. 노라고 하면 이유 따위는 들어야 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 다만 조건은 기간은 딱 한 달, 아마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아, 돈은 상관없어. 그냥 지불해도 되겠지만 당신이 갚고 싶다면 갚아. 이자는 받지 않을 테니까. 기간도 정하지 않을 테니. 그 정도 조건이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듯해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인가. 연인의 역할이라는 건 딱 남들한테 보일 만큼 뿐이니까 감정적인 소비는 필요 없어.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 되는데?”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전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돈을 길바닥에 버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지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보고 그가 말했다.

“당신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

그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이없어 하는 지선을 보더니 덧붙였다.

“나한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는 오히려 그가 자신의 슈트를 들어 올렸다. 용건이 끝났다는 것일까. 지선은 다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물었다.

“왜, 하필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가 지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남자의 웃는 얼굴이…….

참 차가웠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나쁜 여자니까.”

“……?”







샤워를 하고 추위에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에 수분 크림을 바르면서도 지선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 내가 뭘 했다고 나쁜 여잔데?”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 따위는 없었다. 티브이를 보고 광분하는 것도 취미에 없다. 그러나 싸구려 화장대 너머의 피곤에 지친 말간 얼굴을 가진 여자는 그리……. 나쁜 짓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박성진 대리한테 함부로 군 거? 마음에 있지도 않으면서 그걸 거절 안 하는 게 더 나쁜 거 아닌가, 오더가 잘못됐다고 우기는 거래처에 폭언을 퍼붓는 거 따위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삶의 대처 자세 아닌가? 뭐가 그렇게 나쁜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자꾸만 목구멍에 거치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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