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저기 저 차. 저 잿빛 차, 혹시 여기 선생님 차니?”
“잿빛이 뭔데요?”
“얘가, 얘가! 잿빛도 몰라? 저기 있는 회색 차 말이야.”
“저 차…….”
제발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미술 샘 자동찬데.”
“젠……장.”

며칠 전, 처음 보는 남자의 슈트 재킷에 커피를 쏟고 달아나버린 보라. 하지만 그 남자는 보라가 외부 강사로 일하게 될 학교의 미술 선생이었다.

“선생님은 원래 그렇게 착하세요?”
학교 안에서 만난 수상한 여자, 차보라.
“글쎄요. 보통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잘해주고 싶지 않나?”
그리고 갈수록 이상한 말을 하는 남자, 김시오.
유화 고등학교 안에서 그들의 수상한 로맨스가 시작된다.



<본문 중에서>

보라는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그를 향해 말했다. 앞에 있는 이 남자가 미웠다. 자꾸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이 남자가, 자신과는 다른 마음인 게 확실한 것 같은 이 남자가 보기 싫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 남자에게 구 선생님처럼 좋은 사람 중 한명에 포함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잘해주지 않는다고 도리어 칭얼대고 있었다. 정말 속상하고 답답한 게 누군데.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이네요. 전 선생님 학생도 아니고 이 학교 소속도 아니라서요.”
날이 서있는 말투에 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내겠다는 거예요?”
“지금이 어때서요? 혹시 제가 거슬리게 행동한 거 있어요? 아니면, 우리가 지금보다 더 가깝게 지내야 될 이유 있나요?”
보라를 날카롭게 바라보던 시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말했다.
“그래요. 없어요. 그럼 하나만 물읍시다.”
“…….”
“갑자기 무시하는 이유가 뭔데요?”
“……무시한 적 없어요.”
“그럼 질문을 다시 하죠.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이유가 뭐예요?”
보라는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억울했다.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단 말인가? 억울한 마음에 일부러 손톱을 세워 그의 마음을 할퀴어버렸다.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잘해주고 싶다고 하셨죠? 그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한테 잘해주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게 이유예요.”
화가 난건지 그의 입 끝이 굳어갔다. 이를 꽉 물고 있는 듯한 시오의 모습에 보라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상처받은 듯한 그의 얼굴에 봉인한 것처럼 억지로 덮어놨던 마음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시오는 자신을 지나쳐가는 보라를 돌아보지 않은 채 억지로 말을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렇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이 여자와는 남인 듯 적당히 예의 갖추고 선을 그으며 지내고 싶지 않은 게 이유였다. 그런데 그녀는 자꾸 선을 그으려 한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지금 잡지 않고 이 정도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꺼내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누군가에게 흠이 될 만한 말을 꺼내고 말았다.
“임 선생님 때문에 그래요?”
잠시 멈칫한 보라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알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시오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 선생님들이 말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누군가가 하는 말에 이리 저리 휘둘릴 만큼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기가 막혔다. 안 그래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건만 왜 그까지 나서서 자신한테 형편없는 사람이니 뭐니 운운하는 걸까?
“제가 선생님한테 그럴 말 들을 만큼 뭘 잘못했던가요?”
“잘못했죠. 아까 내 얘기 못 들었어요? 벌 받고 있는 기분이라고 했어요. 그게 어떤 마음인지 몰라요?”
“그럼 어떡해요? 그 여자하고 선생님 관계가 남다르다는데! 방해 말고 꺼지라는데! 내가 어떡해요?”
“그래서 그렇게 피했어요? 다른 선생님 말들은 그렇게 잘 들으면서 왜 내 말은 안 듣는데요?”
“무…….”
울컥해져 같이 화를 내려던 보라는 말을 멈추고 시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가 그저 남인 사람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은 그의 얼굴에 잠시 의아해졌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엔 화도 내지 않던 사람이 왜 지금 자신에게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보라의 눈동자가 서서히 흔들렸다.
화를 삭이려는 듯 숨을 내쉰 시오는 보라를 마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임 선생님하고 나 그런 사이 아니에요. 선생님들이 괜히 멋대로 떠드는 거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자기들 멋대로 엮는 모양인데…… 난, 관심 없어요.”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보라가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그걸 왜 나한테 말해요?”
보라는 남자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걸 지켜보았다. 자신만큼 그도 혼란스러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이런 적은 처음인 것처럼. 지금까지 했던 행동을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했다는 듯 그의 얼굴이 혼란으로 뒤덮였다.
생각을 하는 듯 그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약간 삐뚠 웃음이 그의 입가에 번진다고 느낄 때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
“…….”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이런다고.”
“…….”
“다시 한 번 말해줘요?”

현대물 까칠남 순정남 다정남 소유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