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靑河) 푸른 물결같이 변하지 않는 사랑.
압록강의 옛 이름으로 현세와 고구려시대의 이야기로
천년의 시간의 벽을 오가며 펼쳐지는 애틋한 사랑.

해동하.

고구려 5부족 중 소노부의 수장.
그의 눈앞에 나타난 낯선 여인.

“도대체……네가……무엇인데……나를 이리 흔드느냐?”
이 작은 여자아이를, 아이에 불과하다 느낀 여자를 품에 안고 느껴지는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던 이전의 여자들은 여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 아직 교합(交合)을 이룬 것도 아닌데 겨우 여자의 입술을 머금었을 뿐인데 가슴 가득 차오르는 이 희열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아이의 정체가 무섭도록 궁금했다.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이 현세이던 앞으로 올 미래이던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에게 갈 것이다. 내 너를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심장을 걸고 너에게 맹세하노니 나에게는 너뿐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에게는 너 하나뿐이다.”


이재인.

국제적인 유일그룹의 사장.
그의 눈앞에 나타난 낯익은 여인.
꿈속에서 몇 년째 그를 괴롭히던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무슨 이유이든지 그녀를 다시 놓칠 수는 없다.

“잊지 마.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거. 당신 자리는 여기야.”
재인이 그녀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그의 심장 울림이 고스란히 들렸다.
“이 심장이 뛰는 한 당신은 어디에도 못 가. 여기가 당신 자리니까. 당신처럼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천년이 지나도 나 당신 못 잊은 거야. 그래서 내 심장이 이렇게 당신만 보면 아플 만큼 뛰고 있는 거야. 당신이 또다시 어디론가 가 버릴까 봐 겁내 하면서……당신을 놓치고 또 다른 천년은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거라고. 알았어?”



채린.

친부모에게도 버림받은 사랑받기보다는 버려지는 것에 익숙했던 아이.
시간을 거슬러 사랑을 위해 사랑을 찾아 고된 여정을 떠난다.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라는 약속만을 믿으며 시간이 이끄는 대로
사랑을 찾아 그에게 왔다.


[미리 보기]

“내일이면 국내성에 도착할 것이다.”
한동안 채린의 장막을 찾지 않던 동하가 찾아와 던져 놓은 말이었다. 그의 말에 채린이 가타부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국내성에 도착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 터인데 채린은 자신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채린을 보며 동하가 답답한 듯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억지로 자신을 보게 하였다. 참을 수 없는 노화가 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외면만 하지 말고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랐다. 힘겹겠지만 자신에게 기탁을 해주었으면 싶었다.
“너는 정녕 내 속을 뒤집어 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느냐? 아직도 내가 너와의 인연은 없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진정한 신녀라면 너의 하늘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너의 남자가 아닌지. 그래서 날 다른 여인에게 주어도 좋은지 물어보란 말이다.”
그의 말에 참고 있던 채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오기를 기다렸었건만 그의 모습이 보이자 채린은 그에게 고개를 돌려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수한 바늘과 창끝이 되어 채린의 가슴을 찔러대고 있었다. 울음을 입으로 한마디도 뱉어 내지 못하며 채린이 이를 악물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동하가 그녀를 가슴에 꼭 안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말을 하여 무엇 하려 하는 것이냐? 기다려라. 내가 너를 달라 태왕께 간청하여 볼 것이다.”
동하의 손이 안고 있는 채린의 등을 안타까이 쓰다듬었다.
“너는 나를 믿고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 아니. 기다리거라! 무조건 기다려야 하느니.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데리러 갈 것이다. 알겠느냐?”
채린이 대답이 없이 있자 동하가 그녀를 가슴에서 내어놓고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대답하거라. 나를 기다린다고.”
이글거리는 동하의 눈빛을 받으며 채린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기다릴 것입니다. 언제가 되더라도. 당신만, 당신만 기다릴 것입니다.”
더는 참을 수 없음이었다. 며칠 그를 보지 못했던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하니 이제는 그를 잃고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삼 년 전 그를 받아들인 그때부터 자신이 그의 여자라는 것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은 없었으나 그는 자신과 다르리라 생각했었다. 그에게 자신은 스치는 인연일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놓을 수 없다 말하고, 믿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그를 다른 여인에게 내어 주고는 살 수 없다. 비록 자신의 운명이 서럽도록 아프지만 그를 믿고 그를 기다리며 그를 사랑할 것이라 말하고 싶었다. 울음 섞인 그녀의 대답을 들은 동하가 채린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에게 갈 것이다. 내 너를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심장을 걸고 너에게 맹세하노니 나에게는 너뿐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에게는 너 하나뿐이다.”
“저에게도 당신뿐입니다.”
그의 단단한 몸이 그녀를 으스러지듯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채린도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으며 겨우 말을 이었다.
“기다릴 겁니다. 당신이니까……당신이시니까.”
근육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쓸어내리며 숱 많은 검은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었다. 동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달래며 절박하게 호소했다.
“너는 내 여자다.”
채린이 자신의 입술로 그의 입을 막으며 가슴이 미어지도록 흐느꼈다. 동하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녀를 두 팔로 더욱 힘껏 감싸 안았다. 그녀의 입술이 닿자 그의 입술은 굶주린 듯 필사적으로 벌어졌다. 손은 채린의 등을 지나 옆구리로 가더니 좀 더 아래로 쓸어 내려 마치 그녀를 자기 몸속으로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엉덩이를 자신의 몸에 압착했다.
“그동안……보고 싶었다.”
며칠째 밤마다 장막 밖을 배회하다 돌아가곤 했었다. 채린의 말대로 해 주겠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었다. 아니 온다.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다짐을 해도 자신의 발걸음은 이 장막 밖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녀에게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애꿎은 하늘에 대고 화풀이를 하곤 했다. 낮이면 애써 외면하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눈이 갔지만 베일에 가려진 그녀의 모습만이 그의 눈을 아프게 했었다.
채린의 벌어진 입속 안으로 그의 입이 굶주림을 녹이기라도 하듯이 부드럽게 밀고 들어갔다. 손은 목덜미를 덮은 탐스러운 머리칼 속으로 천천히 파고들었다. 자제력을 잃은 그가 신음 소리를 내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혀는 욕망을 누르지 못해 다급하고 격렬하게 그녀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녀의 몸을 더듬는 그의 손길이 바빠졌다. 채린도 그에게 더욱 가까이 가려고 몸을 뒤로 젖혀 그를 꼭 끌어안았다.

모닥불이 너울대며 불타고 있었다. 동하는 자신의 맨가슴 위에 얹어진 채린의 하얀 손을 들어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방금 나눈 사랑에 채린은 힘이 하나도 없는지 그의 팔에 폭하니 안겨만 있었다. 맞닿은 두 가슴이 아직도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를 가슴에 더욱 당겨 안으며 드러난 하얀 어깨를 손으로 쓸었다. 매끄럽기가 그지없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의 뺨에 손을 갖다 대고 그 우아한 곡선을 어루만졌다. 채린이 긴 속눈썹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동하는 빨려들어 갈 듯한 그녀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내 전부이니라.”
어스름한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밤새 그들의 곁을 지켜주던 모닥불도 이제는 사그라지며 연기만이 피워 오르고 있었다. 한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침상에서 일어난 그의 곁에 서서 채린이 동하의 옷매무새를 잡아 주었다. 동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하얀 손을 끌어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두 눈이 마주했을 때 채린이 그에게 살며시 웃어 주었다.
장막을 나서기 전 동하가 다시 한 번 채린을 품에 안았다. 채린도 오늘이 지나면 언제 다시 그의 품에 안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잊지 말거라. 내 심장 소리도. 내 너를 데리러 간다는 약조도, 네가 내 여자라는 것도, 어느 하나도 잊지 말거라.”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기다릴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도 마세요.”
“서두르지 말라니 무슨 소리냐 ? 지금도 널 내 품에서 놓기 싫은 나인 것을…….”
“서두르시다가 혹시나 일이 잘못되거나 오히려 장군께 해가 갈까 저어되어 그러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급히 서두르지 마세요.”
“알았다. 내 그리 할 것이다. 너도 너무 염려 말거라. 한동안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어디 얼굴 좀 보아 두자.”
동하가 채린을 품 안에서 내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샅샅이 그녀의 얼굴 하나하나를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눈길이 채린의 얼굴에 머물렀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쓸고는 자신의 입술을 내려 살포시 베어 물었다. 나른한 따뜻함과 달콤함이 그에게서 흘러나와 오감을 타고 흘렀다. 동하는 그녀에게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떼어 내고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하나만 더 약조하거라.”
채린이 말없이 무엇이든 그에게 약조를 해주겠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없는 사이……절대로 사라지면 아니 되느니라. 절대로. 약조하겠느냐?”
그의 눈은 전에 그녀가 말없이 사라졌던 기억이 상처처럼 떠올라 그늘져 있었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네. 장군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너의 어느 하나도 다 내 것이다. 절대로 내 허락 없이는 사라지지도 아프지도 다치지도 말거라. 알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