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준에게 나는, 나에게 최혁준은 뭘까.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사랑이라 믿었고, 사랑이라 생각하며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요원해져버렸다.
확인하고 싶어졌다.
최혁준이란 남자의 사랑을.
그리고 알아져버렸다.
알고 싶지 않아 내내 묻어두었던 마음을 짓누르던 그것의 정체를.
그것은 욕심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고 보답 받고 싶은 욕심.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당당하게 그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옆에 서고 싶은 욕심.
그와 자신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은 욕심.
욕심이 생겨버렸다.
사랑의 완성이라는 결혼과 사랑의 결정체라는 아이.
구체적으로 생각조차 못했던 그 단어들이 갑자기 절실하게 다가왔다.
나와 함께할 미래를 꿈꾸기는 하는 거야?

길을 잃었다.
오직 혁준만 보고, 혁준을 향해 열심히 달려왔는데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다.
오롯이 그를 향하던 마음이 시들해져 버렸다.
단 하나였던 의미가 희미해져 간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뭘 어떻게 해야 힘을 낼 수 있을까?
말하고 싶다.
날 좀 봐달라고 날 좀 잡아 달라고. 그래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달라고. 좀 일으켜 달라고.
그러나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두려워서.
입을 통해 나올 거부가 나무나 두렵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게 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영영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워 말하지 못한다.

그럼 그렇지! 실낱같은 희망도 뚝 끊어졌다.
“정부니?”
“하, 뭐라고?”
“사랑 없이 몸만 탐하는 게 정부가 아니면 뭔데?”
“사랑? 그깟 사랑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거냐?”
“!”
그래. 너에겐 그깟 사랑일 뿐인데.
이럴까봐 말하지 못했었는데.
너무……아프다.
아파서, 숨이 꽉 막힐 만큼 아파서, 아리고 쑤셔서 억지라도 부려보고 싶어.
한번쯤은, 꼭 한번쯤은 내 아픔을 보이고 싶어.
“그렇구나, 날……사랑하기는 하니?”
“사랑이 그렇게 중요해? 그깟 게 그리 중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줄게. 사랑해. 사랑한다고.”
닿지 못해.
그에게 내 진심은 들리지 않아.
아무리 아파도 내 아픔은 보지 못해.
그만하자.
어깃장을 놓듯 마지못해 뱉어내는 억지스런 말이 더 비참하고 더 깊숙이 찔러들었다.
더 이상 서로에게 상처 주지 말자. 이렇게 끝내는 거 원하지 않아.
이미 충분히 아프고 고통스러웠으니 여기서 그만 멈추자.
그 동안의 추억이라도 간직할 수 있게 더 상처받지 말자.


[미리보기]


까짓 거, 심소율 없다고 못 사는 것도 아니고.
혁준은 입은 체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침대까지 가기도 귀찮았다.
그냥 아무데서나 자면 되지.
평소 옷에 생긴 구김 하나도 용서 못할 만큼 결벽증에 가까운 혁준에겐 가히 상상도 못할 일들이 지금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잔건지 눈이 번쩍 떠지자 혁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집안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켜진 채였지만 밖은 아직 어슴푸레하게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
잔뜩 구겨진 옷에 소파에서 눈을 뜬 한심한 몰골이라니.
혁준은 헛웃음이 나왔다.
나, 최혁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마른세수를 했다.
목이 타는 느낌에 물을 꺼내던 그는 냉장고문에 붙은 메모를 발견하고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야채칸-오이, 고추, 당근……. 과일칸-사과, 오렌지……. 달걀 3개, 달걀 사야 함. 우유-유통기한 2일 남았음. 늦기 전에 먹어야 함…….]
소율의 버릇 중 하나였다. 뭐든 꼼꼼히 기록해 놓는 것.
처음엔 집안 여기저기 나붙는 메모지 때문에 많이 투탁 거렸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
혁준은 자신도 모르게 보물찾기라도 하는 양 집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거실과 주방엔 냉장고 메모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방에는 뭔가 있을지 모른다.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가 옷장을 열었다. 한쪽 귀퉁이가 텅 비어있었다.
일 년을 같이 지냈는데 차지하고 있었던 공간이 겨우 한 귀퉁이에 불과했었다니.
이번엔 서랍을 열었다. 그녀가 쓰던 칸은 역시 작은 서랍 한 칸이 전부였다. 먼지하나 없이 깨끗이 비워져 있는 서랍이 소율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방을 휘둘러보고 거실로 나와 또 크게 휘둘러보았다. 제법 곳곳에 있던 소율의 흔적들이 작정이나 한 듯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또 한숨이 흘러나왔다. 허탈하고 무색한 기분이 짙어졌다.
무엇을 확인하자고 이런 멍청한 짓을 했을까.
언제 이렇게 치워버린 건지.
먼지 하나라도 남겨 놓기 싫다는 듯 깨끗하게 치워버린 소율의 철저함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그렇게나 싫었나?
혁준은 욕실로 들어갔다.
무기력한 사람처럼 느린 동작으로 옷을 벗고 막 칫솔을 집어 들던 그의 몸짓이 그대로 멈췄다.
자신의 것과 나란히 놓인 그녀의 칫솔.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뜻하지 않는 곳에서 발견한 그녀의 흔적에 가슴이 꽉 막히는가 싶더니 또 갑자기 찬바람이 쌩하니 스치는 것 같다.
울컥 치받는 기분에 소율의 칫솔을 집어 들어 쓰레기통 뚜껑을 열었다.
확 던져버리면 그만이다.
혁준은 일명 분노의 양치질이라 이름 붙은 드라마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고는 황급히 욕실을 나갔다. 그가 나간 욕실엔 여전히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칫솔이 서로를 마주보듯 칫솔모가 마주보고 있었다.

일과를 마친 혁준은 부지런히 퇴근 준비를 하다 멈칫하고는 무너지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자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 돼버린 것 같은 이 기분이 너무 짜증스럽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인상을 쓰던 혁준은 속삭이듯 들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또, 또 그런다. 잘 생긴 얼굴 찡그리지 말라니까. 아, 내 남친 너무 말 안 듣는다.'
버릇처럼 인상을 쓸 때면 소율은 아이를 어르듯 미간을 쓸어주며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미간을 쓸었다. 그러다 또 잔뜩 인상을 썼다. 가슴에서 뭔가가 자꾸만 울컥울컥 치받으며 숨이 막혀온다. 주위의 산소가 급격히 줄어버린 것처럼 콱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안 쉬어지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입을 틀어막아 버린 것 같다. 그런 반응이 당황스러워 꽉 막힌 가슴을 부여잡고 어떻게 할지 몰라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상체를 숙여 크게 심호흡을 몇 번 되풀이하고 나자 조금 편해졌다. 소율이 사라지고 일주일 만에 생긴 이 증상은 이젠 일상이 되고 날이 갈수록 횟수도 강도도 더해가고 있었다.
당연히 집에 가는 것도 끔찍해졌다.
그녀가 들어온 후 언제부터인지도 모르는 사이 자신에게 집은 복잡한 문제들과 생각을 마음 편히 정리하고 아무 생각 않고 편히 쉴 수 있는 곳, 일초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은 곳, 생각할 때마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머물게 하는 그런 곳이었지만, 그녀가 떠나버린 지금은 같은 곳이 맞나 싶게 삭막하고 음침한 동굴처럼 전혀 다른 곳이 돼버렸다.
이젠 더 이상 편하지도, 좋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 돌리는 곳마다 소율이 보이고 소율만 생각나게 하는 고통스런 공간이 돼버렸다. 그녀의 물건이나 자취는 찾기도 힘든데, 곁에 있을 때보다 더 또렷이 보이고 강하게 느껴져 혁준은 버티기 힘들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