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의 손이 혜준의 양 어깨에 올려졌다.
“우리 결혼하자, 혜준아.”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우는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혜준을 더 강하게 옭아맸다.
“정우 씨, 우리 이제 그 이야긴 그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가 혜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그녀를 단단히 옭아매고 그녀의 숨결을 빨아들였다. 반항할 기운마저 잃어버릴 만큼 강렬하고 폭풍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나랑 결혼하면 원할 때마다 이렇게 키스해 줄게. 아니지, 더한 것도 해 줄 수 있어. 그것도 확인해 보고 할래?”
입술을 살짝 맞붙인 채 정우가 눈웃음을 지으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는 카멜레온처럼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다른 색깔로 갈아입었다. 혜준은 정우 앞에만 서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장난하듯 그러지 말아요. 헷갈리잖아요.”
“잘 됐네.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거든.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좀 단순해질 필요가 있어.”
“윤정우 씨. 지금 당신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학예회 때 하는 연극의 짝짓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신중한 선택이 필요한 거라고요.”
“지금 난 충분히 신중해. 그 어느 때보다 내 감정에 충실하고 있어.”
“감정만큼 위험한 건 없어요. 무모하고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죠.”
“그렇지만 가장 정직하기도 하지. 난 계산기 두드려가면서 하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묘하게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혜준은 힘없이 반박해 보았다.
“넌 나에 대해서 알아?”
혜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불쑥불쑥 또 다른 정우가 보였다.
“타인이 타인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오만이야. 나 자신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까지 알 수 있겠어? 난 상대에 대해 일일이 분석하고 해부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난 이미 네 전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용기를 내서 내 손을 잡아 봐.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그녀를 바라보는 정우의 두 눈이 따뜻하게 반짝였다.
“당신은 언제나 답이 준비된 사람 같아요. 난 당신의 그런 확신이 두려워요.”
“정답 같은 건 없어. 나도 너만큼 겁나.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해. 내가 원하는 사람이 송혜준이라는 거, 서른이 넘도록 한 번도 뛰지 않던 내 심장이 송혜준이라는 여자를 보는 순간 뛰기 시작했어.”
정우는 혜준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밀착은 그녀를 위해 뛴다는 심장의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바짝 곤두서 있던 긴장이 풀어졌다. 귓가에 나른한 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난 생전 안 믿었던 운명이란 걸 생각했어. 만나야 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어. 난 그거면 충분해.”
혜준은 그를 믿고 싶어졌다. 정우는 세상 누구도 믿지 않던 혜준을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그 힘을 잃고 있었다. 정우가 혜준을 안고 있던 팔을 풀어 시선을 마주했다.
“다른 건 보지 마. 지금 네 마음만 정확히 들여다봐. 정말 나랑 결혼하기 싫어?”
“나중에 후회할지 몰라요.”
“지금 널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야.”
그의 강한 눈빛이 혜준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난 나를 믿어.”
지나친 확신이다. 당연히 경계를 해야 하는 데도 혜준은 그의 말이라 믿고 싶어졌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읽은 듯 정우가 혜준의 볼을 감쌌다. 정우의 입술이 물기에 젖은 그녀의 눈두덩에 닿았다.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그의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콧등을 지나 볼에 스치고 굳어 있는 그녀의 입술 위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혜준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정우가 주는 감촉을 즐겼다. 정우가 혀끝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살 간질이자 덩달아 가슴 언저리도 간질거렸다.
혜준은 살포시 입술을 열어 정우가 주는 얕은 숨을 받아냈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그녀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바짝 긴장해 있던 근육이 풀어지며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혜준은 더 절실히 정우에게 매달렸다. 정우는 입술을 맞붙인 채 한 손을 등 뒤로 돌려 그녀의 몸을 단단히 지탱해 주었다. 그는 땅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사는 나무 같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태현의 그 끔찍한 집착과 아집으로부터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정우라면 온전한 피난처가 되어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쉬고 싶어. 지금처럼 이 사람의 품에 안겨 쉬고 싶어.
혜준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얽혔다. 맑고 강한 눈빛이었다. 혜준은 손을 뻗어 정우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요. 우리 결혼해요.”
그의 두 눈이 밝게 휘어지면서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잘 생각했어. 우리 잘해낼 수 있을 거야.”
정우가 그의 볼에 닿은 혜준의 손을 꼭 힘주어 잡았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혜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정우가 그녀를 새끼를 품어주는 어미 새처럼 꼭 안아주었다. 혜준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정우는 그녀를 품은 채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의 따뜻한 위로에 더 눈물이 났다.
정우는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즈음 그녀를 가슴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걱정 마. 잘 될 거야, 우리…….”
그의 말은 그녀를 안도하게 하는 주술 같았다.
“정우 씬 뭐든지 그렇게 잘 알아요?”
“당연하지.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얼마나 피나게 공부했는데.”
정우의 너스레에 혜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혜준은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그래서 그 나이 먹도록 결혼을 못한 거예요?”
“그거야 송혜준이 내게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그런 거지. 자, 이제부터 송혜준은 내 여자인 거지?”
장난처럼 말하고 있지만 정우의 목소리에서 작은 떨림이 감지됐다. 천하의 윤정우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혜준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내 맘대로 키스해도 되는 거네. 좋았어!”
정우가 짓궂게 웃고선 다시 혜준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려 했다.
“그것까지 허락한 건 아니거든요.”
혜준은 새침하게 정우의 키스를 피했다.
“그럼 키스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거야 서로의 동의하에 해야 하는 거죠.”
“알았어. 그러지, 뭐.”
정우는 너무 쉽게 혜준을 놓아주었다. 이건 평소의 정우가 아니었다. 혜준은 서운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에요?”
“조만간 내 뛰어난 키스에 중독될 건데, 뭐.”
정우는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선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그래, 송혜준. 이 사람을 믿어보는 거야. 세상 그 어떤 무거운 것도 아주 가볍게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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