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담벼락을 타고 흐르는 물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 놓은 반원 모양의 수로를 타고 조르르 흘러간 물은 커다란 조반에 고였다. 잔잔한 수면 위로 붉은 꽃잎 몇 장이 두둥실 떠올랐다. 별채를 둘러싼 작은 정원에 심어진 초목이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들자, 장지문이 훤히 열린 방 안쪽까지 향긋한 풀향이 흘러들었다. '한국 최고의 재벌들 시 몰려 사는 성북동.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집을 한 곳 꼽으라면 응당 열에 아홉은 풍호그룹의 지주가 살고 있는 너른 한옥을 가리켰다. '그 한옥 안 조용한 내실. 한복을 차려입은 조손(祖孫)이 마주 앉아 있었다.'흰 머리가 성성한 정 회장은 맞은 자리에 무릎을 꿇은 서인을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마치 정 회장의 머리에 단정하게 쪽진 비녀 끝머리처럼 매서운 시선이었다.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다탁에는 최근 다도를 즐기기 시작한 정 회장이 평소 즐겨 먹는 작설차가 따뜻한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그녀는 특히 작설차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지리산 쌍계사 전통 수제차의 신실인 목압 마을의 단천재에서 난 작설차만 찾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성정이 얼마나 꼬장꼬장하고 까다로운지 알 수 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했다.”'서인은 냉랭하게 떨어지는 정 회장의 음성에 언뜻 한기가 느껴져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나 쌍꺼풀이 없는 가느다란 눈매와 덤덤한 표정 때문에 그 작은 동요는 외견상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않았다.'“알고 있느냐?”'대답 없는 서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차기 신진 경영인들에게 전설로 추앙받는 자신의 피를 물려받았으면 한 몫, 아니 보통 사람의 여러 몫은 단단히 해내는 것이 당연할진대 여러 몫은커녕 제 할 도리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서인이었다.'아무리 밖에서 낳아 왔기로서니, 매사 주눅이 들어 있는 데다가 소극적이고 행동이 굼떴다. 그도 모자라 한옥의 한편에 위치한 경해원에서 두문불출하며 낮도깨비처럼 지낸다 한다. '예전 같았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 내놓아 봤자 흉밖에 안 돼 오히려 집에만 있는 것을 좋다 했겠지만, 세월이 흐르고 서인도 혼기가 차 가다 보니 마냥 모자라게만 구는 모습이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분명 그 본데도 없는 천한 핏줄의 소생이라 할 만했다.'“본 적도 없는 치들이 너에 대해 왈가왈부 떠들어 대더구나.”'서인은 정 회장의 냉랭한 눈길을 받아 내며 숨을 죽였다.'“풍호그룹에 무지렁이 반푼이가 있다고. 이건 죽은 네 아비에게도 모욕이다. 아무리 쉬쉬해도 이 바닥에서 네 태생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냐만,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내 할 도리는 하는 게 생리겠지.”'잠시 말을 끊은 정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셔 타는 목을 축였다.'“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으니 쉰 말이 나오기 전에 어디가 됐든 그래도 이름값 하는 집안에 매물로 내놓는 게 낫겠지. 내 이름이 걸려 있으니 아무 놈에게나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정 회장은 잔주름이 가득한 입가에 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자리 하나를 물색해 두었다. 성운그룹의 장자다. 인물 빼어나고 성격도 유하다니 혹여 바람이 들어 한량 품새나 판다 해도 너한텐 과분한 자리야. 모자라게 보이는 행동은 삼가거라. 그 천한 핏줄이 어디 가겠냐마는.”'정 회장은 옥색으로 곱게 빚어진 다기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서인의 시선이 다기 잔을 따라 올라왔다.'“……네.”'늘 그렇듯 한 치 늦게 나온 대답이 마뜩치 않아 정 회장은 괜스레 마른기침을 뱉어 냈다.'사실 서인은 성운그룹을 말로만 들어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가 기거하는 경해원에 있는 것이라곤 작은 방 한 칸과 화장실, 폭이 좁은 마루, 뜰에 설치된 작은 규모의 인공 조형 폭포, 그리고 경해원의 일을 봐 주는 수원댁 정도였다.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에서 스물여섯의 서인이 하는 일은, 하루 종일 내원을 바라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그녀의 일상은 이미 오래되고 익숙한 것이었다. '13년 전, 여럿의 목숨을 송두리째 앗아 간 교통사고 이후부터 서인은 정 회장의 제재와 자신의 의지도 더해 외부와 통하는 문을 차단시켜 버렸다. 그녀의 존재에서부터 시작해 치달은 파국이 모든 것을 어그러지게 만들었으므로 그녀는 고개를 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어찌 그리 맹한지.”'정 회장의 한탄스러운 어조에도 서인은 그저 다기 잔 표면에 잔잔하게 이는 물결무늬만 바라보았다.'“올해 안에 어디든 시집을 보낼 테니 그리 알거라.”'“……요?”'서인은 작은 웅얼거림을 토해 냈다. 미처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정 회장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차향을 음미했다. 그러자 서인의 입술이 다시 작게 벌어졌다.'“……결혼을 해서 나가야 하나요?”'“그래.”'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웬일로 조반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를 찾나 했는데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같은 집에 살면서도 1년에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한 정 회장이 서인을 찾는 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가능성만큼이나 이곳, 경해원에서는 기삿감이나 다름없었다.'“본데도 없는 너를 이날까지 키운 걸 후회하게 하지 마라. 멍청히 굴지도 말고 반푼이처럼 모자란 척도 하지 마. 정말 모자란대도 숨겨.”'밖에서 굴러 들어온 망종을 내놓기 낯부끄럽다 하여, 학교도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따로 두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시킬 만큼 가혹한 정 회장이었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차분히 골랐다. '“……할머니, 저는.”'“누가 그런 이름으로 부르도록 허락했더냐?”'스러질 듯 엷은 서인의 음성에 정경원 회장의 얼굴에 찬 서리가 내려앉았다.'“회장님, 저는 결혼은…….”'“너는 이 집안에서 함부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이른 것을 그새 잊은 게냐? 네가 이 집을 나가면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느냐. 너는 집안에 도움이 되고, 나는 네 모자란 꼴을 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젊은 날 비정하다, 무정물(無情物)이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둥 세간에 갖가지 욕을 들어 먹으면서도 영세 상인들을 대상으로 독하디 독하게 사채를 돌려 5년 만에 100억대, 억대를 넘어 조 단위까지 명동 현금시장을 쥐고 흔들던 큰 손인 그녀는 이제 캐피탈이며 현금서비스라는 이름의 합법적인 사채를 움켜쥔 금융권 회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성북동 정 회장’이 바로 그녀였다.'세 치 혀에 칼을 두른 듯 냉정하게 자르는 말에서 한 그룹의 총수로서의 위엄이 되살아났다. 정 회장이 결심한 이상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서인은 참담함에 고개를 떨어뜨렸다.'“명심해라.”'정 회장은 다기 잔을 거칠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망종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