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믿을 수가 없어.' 은혜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절대 자신을 버릴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아니, 저 사람이야말로 분명, 자신이 없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벌써 1년간 그렇게 자신에게 목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분명 그랬던 그였는데,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뭐어? 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정말 박승태가 너랑 헤어지자고 한 거야?”'경민의 째지는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지만 은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스트레이트 잔을 들어 입에 댔다. 불행히도 그때부터 숨이 넘어갈 듯한 경민의 질문공세가 시작되었다. 은혜는 진정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서 지금 이 기분의 정체가 뭔지 차근차근 정리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은혜의 이상기류를 눈치 챈, 대한민국의 용감한 아줌마 경민은 방송국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붙어 지금 자신의 옆에서 핏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바(bar)에 앉아 벌써 여러 잔의 술을 비워낸 은혜는 경민의 목소리가 자신의 신경을 점점 자극해 오는 데 대해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하늘은 역시 은혜의 편이었는지 경민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액정을 보며 한숨부터 흘리던 그녀는 전화를 받는 순간 놀랍게도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거다.'“어머! 우리 딸! 오늘 잘 지냈어? 놀이방 재미있었고?”'경민은 한 옥타브쯤 올려붙인 간드러진 목소리로 한참을 딸과 통화하더니 아무래도 가봐야겠다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미안, 은혜야. 정말 미안해. 내가 내일은 꼭 시간 내서 다 들어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적당히 마시고 가, 얘. 그럼 나 먼저 간다!”'그렇게 호들갑 떨며 나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던 은혜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혼자 있게 되었다. 좋다. 자신이 함께 있어주지 못해 굉장히 미안해하며 가버린 경민을, 그렇게 믿게 놔둔 게 미안할 정도로 혼자임이 좋았다.'자신과 입사 동기인 경민은 벌써 애를 둘이나 둔 30대 중반의 아줌마다. 그런데, 그런 경민에 비해 인물이 빠지는 것도 아니고 몸매가 빠지는 것도 아닌데, 또, 무슨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도 분명 아닐 텐데, 자신은 왜 늘 이렇게 연애에 실패하는 것인지, 은혜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했다. 뭔가 정밀 분석이라도 해서 원인을 찾아내야만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런저런 생각의 늪에 빠져 본인도 모르게 쉼 없이 술잔이 들어 올려졌어도 별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의식은 있을 때였다.'“안녕하세요?”'게슴츠레해진 눈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왼쪽, 그렇다 그녀의 왼쪽, 정확히 아까까지만도 경민이 앉아 있었던 그 스툴에 지금 낯선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해왔다. 혹시나 싶어 반대쪽을 돌아보았다. 자기 말고 뒤의 누군가에게 인사하는 거라면 쪽팔리니까. '아무도 없다. '“지금 저한테 인사하신 거예요?”'혀가 꼬인 게 본인에게도 들렸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게 보일지도 판단이 될 만큼 정신만은 말짱했다.'“네, 그쪽한테 인사했어요. 지금 이 바에는 그쪽하고 나하고 둘밖에는 없거든요.”'남자의 목소리는 솜사탕같이 스위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디 가서 잘 태우고 왔는지 그의 피부는 맛 좋은 카프치노 색이었다. 유들유들한 웃음으로 잘 포장된 얼굴은 취한 은혜의 눈에도 참 잘생겨 보였다. 타이 없이 풀어헤친 푸른 계통의 셔츠에 무슨 색인지 구별이 힘든 재킷을 걸치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그녀의 관찰력으로도 나이와 직업을 알아맞히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은 지독한 취중이니 더 말해 뭣하리.'“혼자 맞죠?”'남자가 물었다.'“네! 그럼요. 난 지금 진짜로 혼자인 걸요.”'은혜는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며 술잔을 입에 댔다. 그러자 그 남자가 은혜의 손에 있는 술잔을 가만히 거뒀다. 초면이라 하기엔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에 은혜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그도 따라 웃는다. 아니, 그는 계속 웃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실연 당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