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좋다.'한 번 자각하기 시작한 마음은 그동안 눌러 뒀던 걸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부풀어 올랐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뜨거움. 설탕이 녹듯 가슴이 달큰해지는 느낌. 맞닿은 손등으로 전해지는 따스함도, 은은하게 퍼지는 그의 향기도 좋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것이 지루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아서 좋았다.'문득 소래항을 보던 그날이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바다 보러 갈까?”'“아니.”'“딱 잘라 거절하긴.”'“너랑 둘이 있고 싶어.”'의외로 솔직한 말에 놀랐지만, 생각해 보면 지예의 결혼식 후 시우는 늘 솔직했다. 어린아이 같을 정도로.'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 전에는 지예와 시우를 통틀어 생각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이름이 시우의 옆에 나란히 서는 것이 싫다.'지예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달큰하게 들떴던 환상이 깨지고 현실이 돌아왔다. 자신과 시우 사이엔 거리가 있다. 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거리. 인간은 전부 평등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는 게 현실이다.'‘넌 날 어떻게 생각해?’'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련은 시우처럼 솔직할 수가 없었다. 시우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두려웠다.'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하겠지. 또 어쩌면 그냥 좀 흥미가 생긴다고 말할지도 몰라.'어떤 대답을 하든, 끝은 똑같다. 연애는 아련과 할지 몰라도, 결혼은 시우의 위치에 도움이 되는, 현지 같은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이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꾹꾹 눌러야 돼. 싹을 잘라야 돼.'하지만 정말 그래야만 하는 걸까?'아련은 옆에 있는 시우를 쳐다봤다. 단정하고 곧은 옆모습이 한 아름 가슴에 들어왔다.'나는 꼭 그 빌어먹을 현실 때문에, 내 소중한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걸까?'“콜라병…….”'웃기게도, 그 순간 아무 상관이 없는 광경이 떠올랐다. 결벽증처럼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시우의 서재에 이물질처럼 놓여 있던 콜라병.'“치웠어?”'시우가 아련을 돌아봤다.'“안 치워, 그건.”'역시 의미가 있는 건가 보다. 아무 의미 없는 쓰레기였다면 콜라병이라는 한마디에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왜? 누구한테 받은 거야?”'아련의 질문에 시우가, “글쎄.”라고 대답하며 빙그레 웃었다. 녹아내릴 듯 다정한 미소. 처음으로 보는 또렷한 미소를 보며, 아련은 확신했다.'현실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 빌어먹을 위치의 차이, 그런 건 꼼꼼히 따져 볼 만큼 인생 똑똑하게 살아왔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삼십 대를 시작하는 이때에 한 번쯤 어리석게, 바보처럼 행동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시우야.”'“응.”'아련은 천천히 일어나 시우의 앞에 섰다. 시우가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아련을 쳐다봤다. 흑진주처럼 까만 눈동자.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향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원했던 눈동자가 오롯이 아련 한 사람만을 담고 있었다.'“널 좋아해.”'시우의 갸름한 눈이 커졌다.'“널 정말 좋아해.”'눈물이 맺힌 걸까?'전처럼 시우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못 말했나?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초조해질 만큼, 시우는 한참 동안 그런 표정으로 아련을 쳐다봤다.'이런 표정은 싫다. 시우가 웃었으면 해서 한 말인데.'이윽고 시우가 입을 열었다.'“하게 해줘…… 키스.”'생각지 못한 말에 아련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뭘 그런 걸 물어보냐?”'“허락 받으라면서.”'“안 돼.”'아련의 단호한 거절에 시우의 표정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변했다. 아련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오늘은 내가 할 거야.”'따뜻한 입술이 겹쳐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감각이 예민한 입술에 닿자 어깨와 등이 간질간질해졌다. 시우의 팔이 아련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두꺼운 스웨터 너머로 체온이 느껴졌다. 벌어진 입술로 혀가 들어왔다. 오랜 갈증을 느꼈다는 듯, 약간은 거칠게 아련의 입술을 탐했다.'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스웨터 안쪽으로 들어왔다. 맨살에 느껴지는 뜨거움에 몸이 떨렸다. 스웨터가 말려 올라갔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시우가 아련을 소파에 눕혔다. 온몸에 시우의 무게가 느껴졌다.'한참 동안 아련의 입술을 탐하던 시우가 고개를 들고 아련을 내려다봤다. 더 이상 이 남자가 무섭지 않다. 허락을 구하는 듯 쳐다보는 저 다정한 눈빛을 왜 야수의 눈빛 같다고 생각했을까?'아련이 미소를 짓자, 시우가 스웨터를 벗겼다. 봉긋한 가슴에 입술이 닿았다. 방금 전까지 입술 안을 헤집던 혀가 유두를 간질였다. 짜릿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시우의 애무는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입술이 가슴을 빨아들일 때마다 자꾸만 비음이 흘러나와서, 아련은 조금 부끄러웠다. 머리를 기울이면 애무에 열중한 검은 머리칼이 보인다. 성실하게 가슴을 핥는 이 남자가, 그 무표정한 남자와 동일 인물인가 싶어 가슴이 저릿했다. 몸이 젖어든다.'시우가 천천히 가슴 주위를 핥다가 입술을 아래로 옮겼다. 살이 없는 배에 입을 맞추며, 아련의 바지를 벗겨냈다. 섹시하지 않은 분홍색 팬티 한 장만 걸친 아련은,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다리를 오므렸다.'“그만…….”'팬티에 손을 대려는 시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안 돼, 이젠.”'시우의 손이 미끄러지듯 팬티를 벗겨냈다. 허벅지를 잡아 옆으로 벌린 시우가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숨을 할딱이던 아련이 시우가 하려는 행위를 깨닫고는 낮은 비명을 질렀다.'“아, 안 돼! 더럽잖아!”'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벅지 사이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촉촉하고 부드러워서 더 짜릿하고 부끄러운 감각. 다리를 움츠리려 했지만 시우의 넓은 어깨가 막았다.'“으읏……!”'젖은 꽃잎 사이로 혀가 밀려 들어왔다. 그 순간 척추를 타고 전해지는 감각에 아련의 가는 허리가 뒤로 휘었다.'“아, 안 돼…….”'머리가 멍해질 만큼 꼼꼼한 애무. 질척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두 손으로 시우의 머리를 감았다. 손가락에 휘감기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조차도 자극적이었다.'달칵. 시우가 바지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시우의 허리가 아련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반쯤 내린 브리프 위로 단단하게 성난 페니스가 보였다.'시우가 아련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허벅지에 뜨겁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아프지 않게 할게.”'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음성.'“괜찮아?”'이 순간조차 허락을 구하는 시우가 터무니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련은 대답 대신 두 팔로 시우의 목을 끌어안았다.'충분한 애무로 흠뻑 젖은 몸 안으로 시우의 것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몸에 꽉 들어차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혔다. 헉, 숨을 몰아쉬는 아련의 모습에 시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아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아련의 호흡이 진정되자 시우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거실에 가득 찼다. 아련은 두 다리로 시우의 허리를 감았다.'아아, 정말 사랑스럽다.'첫 경험보다도 가슴이 떨렸다. 심장이 뛰는 만큼 호흡도 거칠어졌다. 목덜미에 닿는 시우의 뜨거운 숨결조차도 예민한 몸엔 큰 자극.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절정에 달할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할짝.'시우의 혀가 목을 핥고, 아주 살짝 목덜미를 깨물었다. 영역 표시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우는 어떤 표정일까? 시우도 흥분을 할까?'불현듯 시우의 표정이 궁금했다. 혹시나 평소에 그렇듯 무표정일까 두려웠다.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어 시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시우의 얼굴이 보인다.'시우의 표정을 보는 순간, 격렬한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조각상처럼 보일 만큼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살짝 일그러진 모습이 아련을 절정으로 이끌었다.'“아…… 아아…….”'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느낌. 톡톡 튀는 콜라가 몸을 휘감는 느낌. 허리 위에 수만 마리의 나비가 파드닥거리는 느낌이 동시에 몰려왔다.'가느다란 허리가 휘어졌다.'“시우야…….”'떨리는 손으로 시우의 팔을 잡았다.'“아…… 시우야, 시우야.”'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아련의 모습이 심장에 박혔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이 여자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조심해야 하는데. 마음과는 달리 제멋대로 욕정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하반신을 자제할 수가 없다.'절정에 달한 듯 할딱거리는 아련의 허벅지를 잡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그만하라고 해.'망가뜨리고 싶지 않다. 이 작은 몸이 부서지면 안 된다.'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할게.'하지만 아련은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절정에 달한 후라 약간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시우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눈동자를 가리고 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며,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때와 똑같은 간절한 눈빛, 애정이 담긴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쾌감이 시우를 사로잡았다.'“읏…….”'몸에서 뜨거운 것이 빠져나가 아련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아련을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다. 하얀 다리 사이에서 얼마 전까지 시우의 것이었던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련을 침대에 눕힌 시우가 아련의 옆에 앉았다.'“미안.”'시우의 사과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이런 짓을 해놓고, 없었던 일로 하자는 건 아니겠지?'“안 했는데, 피임.”'아, 그런 거구나.'아련은 안도했다. 가임기가 아니다. 가임기였더라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바람에 피임할 생각을 못 했겠지만.'“괜찮…….”'“책임질게.”'괜찮아. 가임기 아냐. 대신 다음에는 꼭 피임하자.'그 말을 하려는데 시우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내가 널 책임질게.”'“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