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쥬드가 뻣뻣하게 굳어있는 채린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품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채린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채린의 얼굴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쥬드는 천연덕스럽게 채린의 몸을 제 것인 양 손으로 훑은 뒤 레아 본 선생님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채린은 자신이 마치 쥬드의 물건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쥬드는 채린의 몸을 안무라는 명목하에 사람들 앞에서 멋대로 쓰다듬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아까 전의 안무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채린이 조그맣게 끼어들었다. 쥬드가 제안한 안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더구나 그런 선정적인 안무를 춰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안무가의 입에서 No가 나오길 기다렸다.'“쥬드의 말이 옳아. 오히려 이런 섹시한 댄스가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기쁨으로 다가올 거야. 쥬드! 웬일이야? 이렇게 적극적으로 안무에 대한 아이디어도 내고. 훌륭한데?”'“레아, 제 생각에는 가족들끼리 아이스 쇼를 관람하러 오는 건데 선정적인 이런 춤을 추는 것보다는…….”'갑자기 레아가 채린의 말을 끊었다.'“오, 쉐린. 이 정도 춤에 선정적이라는 말을 하다니, 넌 TV도 안 보는 거야?”'“그게 아니라…….”'우물쭈물하며 진땀을 빼고 있는 채린의 사정을 모르겠다는 듯 쥬드가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미소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아가 쐐기를 박았다.'“쉐린, 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도 필요한 거야.”'더 이상 뭐라 대꾸하기 힘들었다. 레아의 말에 채린은 울상을 지었다. '연습이 재개되었다. 음악이 나오자 쥬드가 채린의 허리로 손을 뻗었다. 이를 갈며 그의 얼굴을 노려보는데 자신을 내려다보는 쥬드의 눈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듯 너무도 태연했다. 채린은 너무도 화가 나, 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채린이 자꾸만 실수를 하자, 레아가 연습을 중단시켰다.'“그만! 10분만 쉬고 해!”'모두의 환호성 속에 채린은 힘없이 빙상장을 빠져나왔다. 선수들은 휴식시간을 반기는 분위기였지만 자신 때문에 연습이 중단된 것이 엄연한 사실인지라 모두에게 미안했다. 그런데…….'“쉐린 말이야. 쥬드한테 꼬리치는 거 보여?”'“응. 나도 대체 둘이 어떻게 파트너가 됐는지 이해가 안 가. 얼굴은 그렇게 안 생겨서 여우 짓 하는 꼴이란.”'리사가 주축이 되어 채린이 들으라는 듯 떠들어대고 있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주변을 둘러보며 레아 본 선생님을 찾았다. 그들에게로 다가갔다.'마침 그 자리에는 레아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쥬드가 함께였다. 채린이 다가오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쥬드만은 그렇지 않은 듯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있는 것이 차라리 잘 됐다. 채린이 쥬드의 뻔뻔한 시선에 참았던 화가 터져 입술을 깨물며 레아에게 다가갔다. 레아가 인기척을 느끼곤 채린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 쉐린?”'“저 아이스 쇼 그만 두고 싶어요.”'채린이 고개를 숙이고 할 말만을 또박또박 뱉어냈다. 곁눈질로 쥬드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레아도 놀랐는지 큰소리로 되물었다.'“뭐? 그게 무슨 소리야?”'“저한테 좀 벅차요. 다른 사람…….”'레아가 손을 휘저으며 채린의 말을 가로막았다.'“안 돼! 절대 안 돼! 이제 와서 새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건 곤란해. 쉐린, 너도 한번 생각해봐. 지금 빠진다는 건 무책임하지 않니?”'“…….”'레아의 말에 채린은 침묵을 지키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서 돌아선 채린은 약도 오르고 쥬드가 너무 미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눈물이 더 비어져 나오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쥬드가 채린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쥬드가 한 손으로 채린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기더니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예상치 못한 쥬드의 행동에 선수들이 입을 벌렸다. 모두의 충격 속에 레아만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쉐린, 너 우니?”'“아니요.”'채린이 쥬드의 손을 매몰차게 쳐내며 뒤돌아섰다. 눈물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들에게 인사도 없이 빠져나온 자신의 행동이 철부지 아이처럼 느껴졌다. 반대편 얼음으로 미끄러져 나가는데 어느새 레아가 옆에 와 섰다.'“쉐린, 내 생각엔 쥬드와 네가 따로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쥬드와 조금만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면 안무도 금세 파악될 거야. 어때?”'“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하고…….”'“어차피 오늘은 연습할 만큼 했어. 다들 휴식을 원하는 것도 같고……. 어때? 너도 동의하니?”'채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레아가 채린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더니 선수들을 향해 외쳤다.'“오늘은 여기서 연습을 마친다! 끝! 집에 가서 편히 쉬도록!”'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왔다.'''채린은 펜스에 기대, 선수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니 일부러 쥬드 쪽으로는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아, 고집스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선수들이 점차 링크장에서 사라지자 걱정이 슬며시 찾아들었다. 쥬드와 단 둘이 있어야하는 것이다.'마침내 마지막 선수까지 자리를 비우고 링크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탁! 갑자기 환했던 링크장의 불이 꺼지고 단 하나의 은은한 불빛만이 주변을 밝히자 채린이 화들짝 놀라 뒤돌아섰다. 링크장의 불을 끈 것은 다름 아닌 쥬드였다.'채린은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쥬드가 다가오는 것을 빨려들듯 바라보았다. 겁이 났다. 그런 채린의 마음을 알았는지 쥬드의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그와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다 결국 쥬드가 채린에게로 가까이 왔다.'“낭비인 것 같아서.”'채린이 쥬드를 올려다보았다.'“불 말이야.”'쥬드의 말에 채린이 어색하게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쥬드가 말문을 열었다.'“연습할래?” '“네.”'채린이 간신히 “네.”라고 대답하자, 쥬드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얼음 위로 리드했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연습은 비교적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었다. 하지만 채린이 꺼려하는 시간이 이내 다가오고 말았다. 쥬드가 제안한 안무를 소화해내야 했던 것이다. 채린의 구겨진 얼굴에 쥬드가 한숨을 쉬더니 허리에 양손을 얹고 얼음을 맴돌았다.'“하기 싫으면 억지로 할 필요 없어.” '그 말에 오기가 생긴 채린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아뇨.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채린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흘렀다. 그에 쥬드가 체념 어린 미소를 지었다.'“싫어했잖아. 일부러 나에게 맞춰줄 필요는 없어. 레아에게는 내가 잘…….”'“해요! 나 바보 만들지 말고 하자고요!”'채린이 쥬드의 말을 매몰차게 끊으며 말했다. 쥬드가 채린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곤 채린에게 다가왔다. 채린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조금만 참자. 이 순간만.’'쥬드가 채린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가 한 바퀴 턴을 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목, 그리고 가슴을 쓰다듬으며 내려왔다. '채린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 도저히 안무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허공을 응시하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아!”'채린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조용한 링크장 내에 울렸다. 쥬드가 그녀의 얼굴을 잡아 고정시킨 것이다.'“놔요.”'채린이 나직이 말했다.'“춤추면서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게 우습지 않아? 채린 리.”'내려다보는 쥬드의 시선을 채린이 맞받아쳤다.'“놓으란 말이에요!”'결국 채린은 쥬드를 밀쳐내고 링크장 문으로 황급히 미끄러졌다. 하지만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문을 열려할 때 쥬드가 채린을 펜스에 밀어붙인 것이다.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완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결국 채린이 쥬드의 팔에 갇힌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쥬드 역시 채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케이팅을 하며 자신에게 이렇게 힘든 순간이 또 있었을까? 올림픽에서 메달을 놓친 것보다 요 며칠 간의 쥬드의 괴롭힘이 채린에게는 더욱 힘이 들었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참지 못한 채린이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가린 채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채린을 쥬드는 놔주지 않았다. 채린은 결국 펜스와 쥬드의 두 팔 사이에 갇힌 꼴이 되었다. '“놔줘요.”'채린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도 쥬드의 눈빛은 분노로 차갑게 빛났다.'“아니, 안 돼.”'쥬드의 서슬 퍼런 기운에 눌린 채린이 울음을 쏟아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놔 줘요.”'채린의 입에서 결국 울음소리와 뒤섞인 항복의 말이 새어나온 것이다. 잘못했다는 말 속에는 올림픽 이후 쥬드와 신경전을 벌인 것에 대해 후회하는 뉘앙스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녀가 백기를 든 형국이었다.'“뭘 잘못했는데?”'쥬드가 고개를 숙인 채 우는 채린의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채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쥬드에게 자신이 한없이 밀린다는 생각뿐. 무언가가 서러워 채린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쥬드가 얼굴을 가린 채린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또 그럴 거야?”'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쥬드의 말 속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채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쥬드가 두 손으로 좌우로 흔들리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채린이 눈물을 흘리며 속수무책으로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쥬드가 입술을 떼고 채린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고 입술은 쥬드가 남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쥬드가 엄지손가락으로 채린의 입술과 뺨을 한번 씩 스윽 닦아냈다. 닦아내기가 무섭게 채린의 뺨에서 눈물이 또다시 한 방울 톡 떨어졌다. 훌쩍 거리는 그 모습이 언제 자신에게 대거리를 했나 싶을 정도로 아이 같았다. 자신을 외면하기만 하던 행동을 그렇게 차단시키자 채린은 마치 선생님에게 이유도 없이 혼이 난 서러운 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유? 이유를 모르겠지. 쥬드의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머물다 사라졌다. 지난 십여 년 간을 오로지 피겨만을 위해 살아와서인지 그녀는 피겨를 통해 배운 감정이 아닌 것들에는 무지해 보였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쥬드가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채린을 꼭 끌어안았다. '감정을 무장해제한 그녀가 순순히 쥬드에게 안겨왔다. '쥬드의 머릿속에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순진한 그녀를 다른 사람이 취하고 희롱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나 봐.”'채린이 고집스레 눈을 맞추는 것을 피했다. 그러자 쥬드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쥬드에게서 애원조의 말이 나온 것이다.'“나 좀 봐줘, 채린.”'쥬드의 말에 채린이 살며시 눈을 치켜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불안함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를 통해 배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려움을 띠던 채린의 눈동자가 쥬드의 부드러운 미소에 의아함을 느낀 듯 순간적이나마 이채롭게 반짝거렸다. '“이젠 매번 네 사정 봐주지 않아.”'쥬드가 낮게 속삭이며 채린의 입술을 찾아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그녀도 이 남녀 간의 은밀한 행위를 알아챈 듯 부끄러움으로 볼을 붉혔다. 쥬드라는 사람은 낯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통해 남녀 간의 사정을 어렴풋이 배워버린 채린이었다. '어둠 속에 희미한 빛줄기가 링크장을 은은하게 밝히는 가운데, 채린을 향한 쥬드의 계속되는 입맞춤은 길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