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어요.”'“엄청 늦는다고 먼저 자라더니, 빨리 왔네?”'“그렇게 됐어. 샤워하는 거, 도와줘?”'“벌써 씻었어. 그 정도도 혼자 못할까?”'“혼자 하면 너무 힘들잖아. 미끄러지면 큰일 나고.”'“괜찮아. 조심하면 돼. 어서 씻고 자. 엄마도 잔다.”'“네.”'원례의 방문이 닫히자, 태영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태영의 방은 수험생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벽에 붙은 커다란 회의용 탁자에 포트폴리오부터 크로키 북. 갖가지 미술용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태영이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걷어내자, 그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마론 인형이 보였다. '“지훈아.”'태영은 인형을 들고 가만히 속삭였다. 얼마 만에 느끼는 설레는 감정인가? 내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단정 지었던 감정들이 어디선가 꾸역꾸역 비집고나오는 것 같았다. 행복하게까지 느껴지는 감정에 원례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얼굴에 이 기분이 드러날까 봐 무서웠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하지 않아도 될 고통과 고생 속으로 가족을 몰아넣은 주제에 혼자서 행복을 꿈꾸다니…… 눈을 감고 수를 헤아리자. 마음속에서, 머릿속에서 그를 몰아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지만……’'그는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지훈의 인형을 들여다보다 그리움을 끌어안고 잠드는 것이 태영에겐 하루 일과의 마감이었다. 그는 태영의 가슴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기억하는 것도, 그를 꿈꾸는 것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와 코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에게 말까지 걸어오다니…… 정말 기절초풍하는지 알았다. 세월이 변화시킨 그를 보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에 대해 듣는 것도 너무나 큰 즐거움이었다.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위치에서 어깨너머로 그의 모습만을 지켜볼 수 있기만을 바랄뿐이었다. '그에 대한 추억이 평생을 기억하기에는 용량이 너무 적어서 몇 달간의 보너스를 주신 걸까? 누가……? 아빠가……? 바보,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끔찍했던 사고가 사진처럼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이성을 잃은 소년들의 다리 사이로 까닥거리던 태석의 고개가 어렴풋이 드러났고, 태석의 눈빛만이 형형히 빛나며 태영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태영은 육체가 마비된 듯 손가락 하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했었다.'죄책감과 두려움이 또다시 태영을 옭아매기 전에 태영은 질끈 눈을 감고 머리를 털어 영상을 지웠다. 벅차오르던 가슴이 서서히 진정이 되었다.'오전에 명함을 건넬 때, 지훈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태영은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결론지었다. 무려 십사 년 전의 일이었다. 이대로 지훈이 자신을 기억해 내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왜 그랬을까? 둘이 할 말이 뭐가 있다고… 달이 아빠가 그 옛날 마리의 친구가 나라고 얘기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어렴풋이 내가 누군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아…… 제발 모른 척 해주기를.’'태영은 인형을 들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만일 나를 기억해 낸다면 지훈은 그날 일을 물어볼 것이다. 왜 나오지 않았냐고 물어볼 것이 분명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물어올 것이다. 그에게는 별일이 아니겠지만, 나는 절대 대답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신부님에게조차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태영은 죽는 순간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무덤으로 가져갈 것이다.''“아아악! 아빠!”'‘헉! 하…… 하…… 또 꿈인가?’ '명치끝이 심하게 옥죄어 와 심호흡을 하며 식은땀을 식혔다. 심하게 일그러진 태석의 얼굴이 형체도 없이 나타나 태영의 목을 타고 눌렀다. 태영은 간신히 벽을 잡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안방으로 간 태영은 살며시 문을 열어 봤다. 다행히 원례는 깨지 않았다. 이렇게 태영이 가위에 눌려 깨어날 때마다 원례는 자신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몸서리를 쳤다. 자신이 잘못 대처해서 태영의 병을 키웠다고 자책했다.'원례는 사고 후,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그 일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시 되어 왔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원례는 침묵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고통스럽게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에는 태영이 철저히 담을 쌓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에 병적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남자도 사귀지 않았고 흔한 모임 따위도 갖지 않았다. 매일 밤 가위에 눌리면서도 아무 일 없는 듯이 행동했다.'‘아빠…….’ '태영은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으며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항상 있었던 일인 양 태영의 움직임은 규칙적이었다.'' ♥ ♥ ♥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한 반소 패션은 20층 사옥의 정중앙인 10층에 하늘정원을 두고 있다. 하늘정원은 일종의 직원 휴게실인데 질 좋은 커피와 함께 단돈 천 원에 샌드위치와 같은 패스트푸드도 판매했다. 도심 속 공원처럼 조경이 풍부하게 형성되어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지훈과 찰스가 반소 패션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사무실을 옮기면 어떨까? 당분간은 계속 여기로 출근해야 하잖아.”'찰스가 벌써 세 개째인 샌드위치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말했다.'“안 그래도 헬레네 팀하고 15층에 사무실을 꾸밀 거야.”'“이젠 헬레네가 아니지. ‘소울메이트’지. 영혼이 통하는 사람. 어쨌든 잘 됐다. 난 여기가 진짜 맘에 들어.”'“이젠 소울메이트도 아니야. 기획안을 이사님께 제출했어.”'“그래? 좀 더 고려해 보려던 거 아니었어? 아, 이것도 말하려고 했는데 나, 집 샀다.”'“그새 계약했어? 넌 무슨 집을 쇼핑하듯 사냐?”'지훈이 서울로 온 암묵적인 목적이 태영을 찾아보는 것이라면 찰스는 구혼자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는 결혼이 하고 싶어서 환장했다. 동혁의 아이들을 만난 이후로 병이 더 심해졌다. '“난 한국 여자와 결혼할 거야. 당장 결혼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놓고 싶어.”'“이제 봤더니 충동 구매했구나.”'“다른 사람이 우리 앞집을 계약하기 전에 네가 빨리 사!”'“넌, 아무래도 날 너무 좋아해. 오해받기 딱 좋으니까 적당히 해라.”'“지훈!”'“여기서까지 나랑 이웃하고 싶냐?”'“지훈, 만날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한국 오더 받은 거 아니었어?”'“그 사람은 이미 만났어.”'“뭐? 대체 언제 만난 거지? 우린 따로 움직인 적도 없는데?”'“너도 이미 만났어.”'“와우! 내가?”'찰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누구, 누구를 만났는지 헤아려 보고 있었다. 그들이 잠시 대화를 멈춘 사이에 태영과 상춘이 카페테리어에서 커피를 받아들고 반대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어! 헬레네다.”'“눈독 들이지 마. 임자 있어.”'지훈이 태영과 상춘의 동태를 지켜보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서 두 명의 남자가 쑥덕대는 소리가 들렸다.'“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둘이 동거한다던데? 그래도 좋냐?”'“진짜?”'“정 대리가 김상춘하고 한 아파트 살잖아. 뭐, 말로는 헬레네 팀원들하고 들락거린다는데, 둘이 워낙 소문이 많잖아. 작년에 김상춘 승진 케이슨데, 그것도 마다하고 헬레네에 붙박이로 붙어 있는 것도 이상하고.”'“김 팀장이 나이가 더 많잖아.”'“두 살? 그거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