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누르고 머리끝에 매달린 물기를 다시 훑어 내렸다. 쓰던 수건으로 거울을 말끔히 닦아내고 세제로 깨끗이 닦아냈던 세면대와 변기 뚜껑의 물기를 걷어내는 손길은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 '좁은 욕실 한쪽에 놓여 있던 목욕 용품들을 가지런히 세우고 샤워기로 바닥에 물을 뿌려 머리카락을 모으고 비누거품을 걷어낸 다음, 욕실 장에 넣어 두었던 팬티를 발에 꿰고 끌어올렸다. 목이 늘어지긴 했지만 하얀 반소매 면 티를 입고 화장지를 끊어 배수구에 모아두었던 머리카락을 집어 들었다. 욕실 문을 열고 곧장 싱크대 앞으로 걸어가 쓰레기통 속으로 머리카락이 싸인 휴지를 집어넣었다. '창가에 놓인 시계로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는 동요 없는 눈동자와는 다르게 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침대와 부엌 사이에 놓인 작은 붙박이장을 열고 하늘색 면바지를 꺼내 입고 곧장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불빛으로 투명한 통에 담겨 있는 재료들을 확인하고는 식탁에 꺼내놓았다. 전기밥솥에 고슬고슬하게 지은 하얀 쌀밥을 볼에 담고는 소금과 참기름, 통깨를 뿌리고 골고루 주걱으로 비볐다. 도마 위에 김발을 놓고 구운 김을 폈다. 따뜻한 밥을 삼분의 이 가량 살살 편 다음 도톰한 계란지단, 당근, 햄, 단무지, 우엉, 맛살, 시금치를 차례로 올린 다음 돌돌 말았다. 꼭꼭 눌러 주는 손길에 김밥 한 줄이 완성되자 그다음에도 똑같은 동작이 반복되었다.'작은 식탁 위에는 남은 밥도, 남은 재료도 없이 텅 빈 그릇들만 놓여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개수대에 수도꼭지를 틀어 빈 그릇을 물에 담가 두고 호일 스무 개를 똑같은 크기로 잘랐다. 묵직한 검은 손잡이의 칼을 꺼내 들고 도마에 두 줄씩 놓고 같은 크기로 김밥을 썬 다음, 호일에 한 줄씩 싸서 직사각형의 통에 김밥을 가지런히 담고 뚜껑을 닫았다. 싱크대에 담가 놓았던 그릇들을 헹구어 세척기에 넣고 도마는 깨끗이 닦아 세워 두고 행주로 식탁이며 싱크대를 훔치고 얼룩진 행주를 비누로 깨끗이 빨아 널었다.'창가로 가 커튼을 젖히자 붉은 기운이 도는 햇살이 높은 빌딩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맑은 아침이었다. '붙박이장을 열고 면바지를 벗자 매끈한 다리가 형광 불빛에 뽀얗게 드러났다. 바지 걸이에 걸린 청바지를 꺼내 입고 하얀 면 티를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마른 듯한 가냘픈 등과 고운 목선이 애처로웠다. 크림 빛이 도는 아담한 가슴에 분홍빛 앙증맞은 돌기가 수줍은 듯 움츠렸다. 작은 서랍을 열고 살색 브래지어를 꺼내 가슴에 두르고 손을 등 뒤로 뻗어 호크를 세 번째 칸에 끼운 후 하늘색 남방을 선택했다. 흰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가 발랄해 보였지만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하얀 미니화장대 앞에 서서 얼굴에 스킨을 뿌리고 찰박찰박 두드린 다음 로션을 바르고 에센스를 발랐다. 비비크림을 집어 들었지만 이내 내려놓고 살굿빛 투명한 립글로스를 입술에 살짝 발랐다. 어깨에 찰랑거리는 머리를 정성스레 빗은 다음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모아 왼손으로 한 아름 잡고 오른손으로 빗질을 가지런히 한 후 굵은 검은색 고무줄로 묶었다. 포니테일로 묶인 머리를 거울로 꼼꼼히 확인한 후 화장대 의자에 놓인 카디건을 남방 위에 걸친 후 백을 어깨에 걸쳤다. 침대 위를 찬찬히 쳐다보고 화장대에 걸쳐진 빗을 통에 집어 놓고 쓰러져 있던 비비크림을 바르게 세웠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샌드위치 통을 꺼내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김밥 통 위에 놓고 찬합의 고리를 눌러 잠근 후 한 손에 들었다. 다섯 걸음을 걸어 현관에 놓인 단화를 신은 후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누르자 환했던 실내가 조금 희미해졌다. 현관문을 열고 문이 닫히자 삐리릭 전자음이 들리고 복도를 걷는 여자의 발자국이 정지된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듯 조용히 울렸다.''외관은 각기 다르지만 높다란 크기만큼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물들 사이로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 햇살이 빌딩 숲 사이사이로 곱게 내려앉아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중이었다. '아파트 건물을 나와 오 분을 걸어가면 아담한 이층으로 된 건물이 디지털단지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빨간 벽돌에 연둣빛 담쟁이넝쿨이 한 뼘이나 올라가 싱그러웠다. 소박하고 푸릇한 건물 모양새가 사람들에게 정감을 주었다. '일층 첫 번째 가게는 봉평 칼국수 집이고, 그 옆에 두 번째 가게는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파는 분식집 즐겨찾기, 세 번째 집은 네일아트, 꿈의 궁전이 예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네 번째 가게의 상호는 모퉁이였다. 반듯하지도 크기도 겨우 다섯 평 정도나 될까. 각이 져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외따로이 떨어져 있는 작은 찻집. 나무판 위에 삐뚤어진 글씨로 ‘모퉁이’라고 쓰인 간판은 한 번에 보이지 않았지만 주인은 예사로이 지나쳤다. 출입구 왼쪽에 검은색 아크릴판에 예쁜 글씨로 메뉴가 써져 있었다.''아메리카노 ***** 1500원'카페라떼 ***** 2300원'카페모카 ***** 2300원'카푸치노 ***** 2500원'녹차 ***** 1500원'허브티 ***** 1500원'김밥&샌드위치 - 2500원(아침만!)'밀크번과 쿠키 - 1300원''찬합 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까치발을 들어 열쇠를 구멍에 맞추어 돌렸다.'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가 유리에 붙어 있던 작은 하얀 플라스틱 패널을 뒤집어 놓았다. open이라 쓰인 조그마한 패널이 작게 흔들렸다.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탁자 두 개와 사인용 탁자가 전부인 홀을 지나 접이문을 들어 올려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방을 수납장 안에 넣고 오디오의 전원을 켰다. 찬합을 열어 김밥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았다. 샌드위치는 미니 냉장고에 들여놓고 닦아 두었던 물받이 트레이와 찌꺼기 통을 커피 머신에 차례대로 끼우고 정수기 물을 받아 물통에 담아 채우고 원두 통에 커피 원두를 넣었다. 미니 오븐에 예열을 한 뒤 냉장고에서 해동이 된 번을 꺼내 팬에 간격을 맞춰 올려놓은 뒤 오븐에 집어넣었다. 타이머를 돌리고 스위치를 누르자 밝은 불이 들어왔다. 손님 맞을 준비를 모두 마친 것이다. '무선 주전자에 물을 담아 끓이는 동안 길쭉한 통에 담긴 커피믹스 두 개를 하얀 머그잔에 털어내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뜨거운 물을 붓고 이른 아침,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손안에 전해지는 따듯한 기운에 작은 미소라도 지어도 볼 텐데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입 안으로 느껴지는 달달한 맛에 새벽부터 동동거리며 분주했던 노고가 꿀꺽 삼켜졌다. '간이의자에 앉아 얼룩 하나 묻지 않은 유리 너머로 밖을 바라보는 지금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면……. '빈 바닥을 보이는 머그잔을 아쉬운 듯 보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문 안쪽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며 맑은 음을 자랑하자 무표정했던 얼굴에 푸른 물감이 번지듯 맑은 음색이 또로롱 굴러 나왔다.''“안녕하세요, 맑은 날이죠?”'뽀얀 얼굴에 미소가 어리자 인상이 확 바뀌고 모래를 마주한 임 실장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날아왔다.'“우리 예쁜 아가씨, 안녕!”'“오늘 출근이 이르시네요?”'“그러게. 오늘 가을 제품 최종 미팅이 있거든. 이날만 되면 말라죽지 않은 게 기적이야.”'“후후, 아메리카노로 하실래요?”'유아동복 디자이너인 임 실장은 모퉁이의 단골손님이었다. 카운터에 다가와 김밥을 집어든 임 실장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후히요!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거야. 김밥 세 줄만 싸주라. 커피 두 잔이랑. 자기는 왜 김밥을 감질나게 싸는 거야. 많이 좀 만들어라.”'커피를 뽑고 슬리브를 끼웠다.'“후후, 시럽 넣어 드릴까요?”'“아니, 됐어. 샌드위치도 하나 포장.”'“양이 과하신 것 아니에요?”'“이런 날은 마구 먹어 줘야 해. 아마도 사무실에 같이 해치울 굶주린 아가씨들의 눈이 번쩍 떠지겠지, 뭐.”'만 오천 원을 받은 모래가 거스름돈을 내밀었다.'“예쁜 아가씨, 오늘도 수고해.”'“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고마워, 김밥 먹고 힘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