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고개를 푹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최대한 덮고, 부어오른 오른쪽 눈두덩을 오른손으로 가린 채 버스에 올랐다.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 이삼 일에 한 번은 꼭 마주쳤던 버스 기사 아저씨는 무슨 말을 건네려다 도로 삼켰다.

아마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었을 거다. 그러고는 긴 한숨을 내쉬겠지. 혼잣말처럼 ‘가엾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괜찮지 않아요, 아저씨. 난 전혀 괜찮지 않아요.’

해림은 속으로 그 말을 되뇌며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동수에게 얻어맞는 일은 이골이 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거나하게 술에 취한 동수가 오늘은 빌어먹을 네 어미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 널 낳은 것 같다고 뜬금없이 트집을 잡더니, 교복을 챙겨 입고 있던 해림의 뒷머리를 잡아채 그대로 장롱 문짝에 박아 버렸다.

마치 공을 집어 던지듯 두어 번 더 짓찧어 놓고도 여전히 분이 덜 풀린 듯 연신 씩씩대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욕과 저주를 쏟아 냈다.

제 엄마를 닮아 반반하게 생긴 저 낯짝으로 나중에 분명 이놈 저놈 다리 벌려 줄 게 뻔하다고. 천하의 쌍년이라고.

늦기 전에 수능을 보러 가야 한다는 해림의 말에 잔뜩 쌓인 도박 빚으로 널 대신 데려가겠다는 빚쟁이들이 한 트럭인데 무슨 수능이냐고 말했다. 네까짓 게 감히 대학을 꿈꿨냐며 힐난하고 조롱했다.

아버지가 딸이 성인이 되면 도박 빚으로 팔아넘기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집구석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억제하지 못하는 동수의 분노는 늘 해림에게 향했다. 이유는 모른다. 아니, 없는 건지도. 동수는 해림이 눈에 띄기만 하면 욕설을 퍼붓고 폭행을 일삼았다.

해림은 왼쪽 손에 꼭 쥐고 있던 잔뜩 구겨진 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수능 날인데 빈속으로 가면 안 된다고, 가다가 꼭 빵이라도 하나 사 먹고 가라고, 어제 할머니가 쥐여 준 오천 원짜리 한 장. 해림은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입을 꽉 다물며 눈물을 삼켰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야. 아직은…….’

버스에서 내린 해림은 시험이 치러질 E여고를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시험 시작 5분 전. 최소 30분 전에 입실을 해야 하는데 허락된 시간은 이미 지나 버렸다.

엉망이 된 얼굴을 가릴 새도 없이 달리던 해림은 굳게 닫힌 교문 앞에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학생, 많이 늦었네.”

“지금 들어갈 수 있을까요?”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남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간 휘청했지만, 해림은 교문 창살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애원했다.

“제발, 제발 들어가게 해 주세요. 저 오늘 꼭 시험 봐야 해요.”

그는 해림의 부푼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나마 동정 어린 눈빛이 어렸지만 이내 이성을 찾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 2분 후면 시험 시작이야. 여기서 큰 소리로 떠들면서 시험 방해하면 안 돼. 어서 돌아가.”

“아저씨…….”

“그러게 이렇게 중요한 날 왜 지각을 하고 그래, 쯧쯧.”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고, 이내 교문을 등지고 섰다.

“아저씨 제발요! 늦고 싶어서 늦은 거 아니에요. 새벽부터 서둘렀어요. 근데…….”

이 문을 열고 시험실에 입실하기 위해 난생처음 보는 이 남자에게 내가 왜 늦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만 한다. 무릎이라도 꿇고 그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일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침부터 술에 취한 아버지가 절 계속 때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잡고 놔주질 않았어요. 제 얼굴 보이시죠? 장롱 문에 찍혀서 그래요. 이마에 피멍도 들었어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 순간,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남자는 해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더니 아무 대꾸 없이 유유히 학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해림은 멍하니 서서 몇 번 더 그를 불러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의미한 짓이란 걸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다. 눈물도 나오질 않는다. 머릿속이 멍할 뿐이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해림은 앞으로 쏟아진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해림의 주변에 모여 있었다.

아이를 시험장에 보내 놓고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부모들과 수험생을 응원하러 온 학생들. 그리고 길을 지나다 일련의 소란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일반 시민들까지.

쑥덕거림이 점점 더 크게 들릴 때쯤, 해림은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