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물이라는 뜻의 水가 들어가서인지 지유 기억엔 유난히 수요일에 비가 많이 내렸었다. 수요일에 비가 내리면 지유는 설레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준영이 장미꽃다발을 들고 집 앞에서 기다렸었다. 그것도 그가 군대에 들어가면서부터 완전히 끊겼지만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건지 그 후로도 한동안 비오는 수요일에 두근거리는 현상이 지속되었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겠지?’'잘나가다 또 그 망할 놈의 생각에 눈물이 뺨으로 번지고 말았다. 노래에 감정이입 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감정에 빠져 버려 손가락으로 감출 수 있던 눈물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버려 결국 손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처음 알았다, 눈물이 머리에서 통제가 안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실연이라는 이름의 통증은 잠잠해졌다가도 이렇게 발작적으로 사람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 아프게 한다.'지유는 주책없는 눈물을 닦기 위해 가방 속에 손을 넣어 휴지를 찾았다. 이상하다. 가방 속에 있어야 할 휴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젠장. 민호 집에 놓고 왔다. 녀석이 마지막으로 코 나온다고 휴지 찾을 때 아예 면상에 휙 던져 주었다. 그리고 챙겨오지 않은 것이다. 눈물은 콧물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콧물을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훌쩍거리며 마실 수밖에 없다.'‘소리를 내면 울고 있는 걸 들킬 텐데.’'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차에 놓인 여행용 티슈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는데 동시에 현준도 손을 뻗고 있었다. '덥석! '지유의 작고 하얀 손이 현준의 손에 쏙 들어가고야 말았다. 순간 둘은 감전 된 것 같은 느낌에 얼른 휴지에서 손을 빼 버렸다. 아마도 울고 있는 것 같은 지유에게 티슈를 건네주려고 한 것 같은데 하필……, 타이밍도 절묘했다. 휴지가 둘 사이를 가로막지 않고 있었다면 영락없이 두 손을 꼭 잡은 모습이었다.'이럴 때일수록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어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뭔가를 끄집어내어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야만 했다. 지유는 잘 돌아가지 않은 머리를 애써 굴려가며 궁색한 변명거리라도 찾고 있었다.'“저기, 죄송합니다. 감기가 걸렸는지 계속 콧물이 나와서……, 휴지 좀 쓸게요.”'“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표정과 목소리.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눈치였다. 언제나 그의 반듯한 모습만 보다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니 지유는 그에게 더 미안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지유의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서둘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지유는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 있는 힘껏 잡아 빼야 하는데 안 빠진다. 평상시에 어디 가서 약하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그녀인데 안 빠지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지유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불붙인 폭탄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도 벨트는 순간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꿈쩍을 않았다. '“잠깐만요. 이걸 누르고 잡아 빼야 돼요.”'보다 못한 현준이 그녀의 벨트를 대신 빼주고 말았다. 되도록이면 그녀의 벨트에 손을 대지 않으려 했는데 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아까처럼 울음을 터뜨려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앗, 가, 감사합니다.”'아무리 표정을 관리하려고 해도 그녀의 얼굴은 이미 울상을 짓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되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바쁜 나머지 약을 먹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희한하다, 그동안 그녀에게 복이 달라붙은 것처럼 좋은 일만 있었는데 고까짓 약 한 알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니. 처녀 보살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새삼 감탄과 함께 전율이 일었다.'“그럼, 안녕히 가세요.”'“잠깐만요.”'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하자 현준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는 기다란 팔을 뻗어 뒷좌석에 놓인 가방을 잡더니 거기서 우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아니에요. 바로 앞인데 뛰어가면 돼요.”'“얼마 안 되는 거리라도 감기 걸린 사람이 비 맞으면 감기가 도집니다. 더군다나…….”'그의 걱정 어린 말이 그녀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아이들 가르치시는 데 감기 걸리면 힘드실 텐데요.”'한창 묘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던 차에, 그가 냉정하게 수업이라는 말을 언급하자 우산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 걱정 마세요. 내일 수업은 절대로 지장을 주지 않을 테니.’'지유는 저도 모르게 우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과도하게 힘을 주다 보니, 다 쓰고 남은 나머지의 힘들이 그녀의 몸의 균형을 깨 버리고 말았다. 이미 차문을 연 상태에서 그녀는 뒤로 넘어갈 뻔했고 그런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현준은 한 팔로 그녀의 등을 휘감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얼굴은 그의 넓적한 가슴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한 가지의 소원은 얼굴 없는 미녀도 아니면서 얼굴이 사라지는 거였다. 얼른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창피함에 얼굴을 재빨리 떼어낼 수가 없었다.'“하아, 어쨌거나 조심히 가십시오.”'겨우 한숨 돌린 현준이 그녀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말했다. 짧은 대답도 못하고 그녀는 우산도 놔둔 채 집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그녀의 뒷모습만 봐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기에 현준은 그런 그녀가 집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만 보고 차를 움직였다.'지유는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입은 그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아이고, 아이고, 내일은 또 어떻게 해?”''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그녀가 아침을 맞았으니 밝은 햇살이 거슬릴 뿐이었다. 어젯밤 내린 비로 우울했던 하늘이 활짝 개였건만 그것이 그녀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불 속에 꽁꽁 숨어 있던 지유는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래,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런 것쯤이야.”'독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지유는 약부터 찾았다.''행운의 약을 먹은 탓인지 지유는 하루 종일 날아다녔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그 약효가 떨어지는지는 몰라도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게 되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가는 집은 다름 아닌 영진의 집이었다.'“어떡해. 어떡해.”'그녀는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영진의 집에 현우가 있어도 곤란하고 현준이 있어도 미칠 지경이다.'“제발, 제발 영진이만 있기를…….”'그건 불가능하더라도 어차피 과외만 조용히 하고 나오기만 하면 되니까 엘리베이터에서라도 만나지 않으면 된다고 막 생각을 하는 순간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불길하다. 3층은 이 아파트 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누군가 타려고 한다. 지유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구석으로,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얄팍한 생각으로 그렇게 구석에 숨어 있으면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못 알아볼 것 같아서였다. 몇 사람이 우르르 올라타는데 다행히 여자들이었다. 안심이 된 나머지 긴 한숨을 쉬려는데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한 남자가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여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 사람은 그녀의 불길한 예상대로 영진이 아빠 현준이었다. 다행히도 지유가 앞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다 보니 그녀를 보지 못한 듯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고 50층이 가까워 오니 엘리베이터 안은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았다. 다 내리는데 아직도 뒤에 사람의 체온이 감지되자 현준은 고개를 살짝 돌려 흘끗 쳐다보았다. 익숙한 그녀의 모습을 알아차린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저도 모르게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눈을 질끈 감은 지유도 그에게 인사를 했다.'“네, 영진이 아버님.”'평상시에는 몰랐는데 그녀가 아버님이라고 하자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 되어 영 언짢게 느껴졌다. 맞는 말이다. 영진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왜 그게 기분 나쁜 일인지. 당연한 것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그는 저도 모르게 턱 근육을 씰룩거렸다.'급작스러운 술 약속에 집을 나서던 현우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지금이 8시니까 지유 씨가 영진이 과외 하러 올 시간이군. 그냥 얼굴 한번 보고 가?”'현우는 엘리베이터를 예의 주시했다. 지유가 시간을 칼 같이 맞춰서 오기에 아마도 지금 멈춰서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녀가 내릴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더 애틋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우연히 보게 되는 거니까 그걸 가지고 질색하지는 않겠지?’'띵!'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그녀가 보였다. 참 희한하다. 그가 기다렸던 지유보다는 자신의 형이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훨씬 큰데 그의 눈에는 지유만 보이다니. 반가운 마음에 얼굴에 웃음이 서서히 번졌던 현우는 같이 내리는 형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같은 공간에서 내리는 그들에게서 미묘하면서 야릇한 기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