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싸움 못하잖아!

가희는 최대한 얌전한 옷을 골랐다. 옷장에 걸려 있는 패셔너블한 옷들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장례식장에서나 입을 법한 검정색 정장을 꺼내 들었다. 민세의 성적을 예약하러 가기 전 영현고의 교장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민세의 입학 문제로 만나게 된 박영범 교장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었다. 꽤나 고리타분해 보이는 눈매만큼이나 찬란한 가희의 원피스 차림에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던 사람이었다. 가희는 그의 성향이 어느 쪽인지 추측이 되고도 남음이 있어서 옷차림부터 신경을 쓰고 있었다.

민세가 1년 간 학교생활을 잘해 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낸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연극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민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동기가 약간 불순하긴 하다. 대표나 주영이 알게 되면 노발대발하며 시작도 하기 전에 철벽을 세우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희는 그의 첫사랑이… 그렇게 이름 붙여도 될 정도인지 어떨지는 아직 잘 모르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여학생을 향한 그 순수한 마음의 경험이 노래할 때 더없이 좋은 영양제가 될 것이다. 그 사랑이 성공적이든, 실패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연극 동아리 활동이 앞으로 연기자로서의 길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또래들과 함께, 그것도 자발적으로 무대를 만들어가는 아이들 속에서 가희는 민세가 정말 좋은 경험을 하게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가희는 자신의 자유로운 패션 스타일을 잠시 내려놓고 얌전히 하얀 블라우스 위에 검정 재킷을 덧입었다. 블라우스의 가장 윗 단추까지 꼼꼼히 챙겨 잠그던 가희는 그래도 무언가 맘에 들지가 않아 옷장 문에 걸쳐져 있던 하얀 실크 스카프를 꺼내 들었다. 전신용 거울 앞에서 스카프로 목을 둘렀다. 쇄골 앞에서 커다란 리본을 묶어 늘어뜨릴 때 문득, 고집스러운 꼬맹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엄마가 골라준 나비넥타이를 거부하던 동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희는 리본의 모양을 다듬으면서 빙그레 웃어 보았다.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 꼬맹이와의 인연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아닌 모양이라 여기며 가희는 다시금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아직도 연락이 없잖아? 명함 받아갈 땐 당장이라도 연락할 것 같더니만… 쯧!”

가희는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 가는 만큼 도통 연락 없는 동화에게 역정을 내어 보았다.

동화를 생각하며 들여다보고 있던 거울에 비친 문이 두 번 소리를 내더니 열리고 있었다. 가희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 곳에 한껏 사랑을 담은 두 눈이 웃고 있었다.

“가희야, 학교 갈 준비 다 됐어?”

“네! 당신은 모임 갈 준비 끝났어요?”

정 대표는 한껏 휘어진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가온 그는 가희의 아랫배에 오른 손바닥을 가만히 대며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가희가 간지러워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아빠가 된다는 사실에 그가 이렇게도 좋아할 줄은 몰랐다. 늘 내색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처음 임신 사실을 얘기할 때, 가희는 그가 반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다분히 긴장을 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기뻐했다. 그런 아기의 아빠 앞에서 예비 엄마의 행복은 배가되었다.

“조심해서 잘 다녀와! 성질은 좀 죽이고… 이제 우리 아기 생각 해야지….”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행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욱! 할 그녀의 행동을 미리 말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가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가희 스스로도 배 속에 아기가 있다는 것이 실감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숨소리마저 부드러워지는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아기가 세상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알아 가는 곳이 바로 그곳, 배 속이니까… 엄마와 아빠의 음성을 통해, 그리고 엄마의 심장 소리를 통해 생명의 모습을 배우게 될 아기를 위해 가희는 최선을 다해 좋은 소리를 들려주리라 다짐을 했다.

“알았어요. 걱정 말고, 애들 하고 점심 맛있게 먹어요.”

“아니, 그런데 왜 하필 약속이 토요일에 잡혔어? 수업도 없는 날이잖아.”

학교 수업이 없는 날 만나자고 한 교장의 저의를 알 수가 없다며 대표는 계속 불평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날은 소속사 식구들이 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를 하며 단합을 해 보자고 날을 잡은 날이었다.

“토요일에도 학교에 일이 있어서 출근을 하신다잖아요. 보는 눈도 적고, 맘 편히 이야기하다 오면 되니 저는, 뭐, 더 좋은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