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승현이 녀석은 너한테 여자 없다고 했다. 그런데 절친도 모르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없던 여자가 난데없이 생겼다고? 혹시 어쭙잖은 기사도 정신 발휘해서 날 속이려는 쇼라도 하겠다는 거야? 백재훈이 언제부터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궁금한데?”'진환의 비아냥거림이 날아들자 재훈의 걸음이 멈췄다. 해주는 재훈의 굳어진 표정을 본 순간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켰다.'“무시하고 그냥 가요, 우리!”'해주가 그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흔들리던 재훈의 눈빛은 오히려 단호해졌다. 그가 뜻 모를 미소를 그리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작정하고 덤비고 있어, 여기서 그냥 나가면 난 평생 놀림꺼리가 돼. 이젠 신해주 씨뿐이 아니라 내 문제도 되어 버렸군.”'그렇게 말한 재훈이 천천히 몸을 돌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바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진환 패거리들을 응시했다.'“무슨 근거로 내가 말도 안 되는 쇼를 한다고 주장하는 거냐? 네 말대로 난 관심 없는 여자한테 어쭙잖은 기사도나 발휘하는 착한 성미도 아닌데 말이지. 유치한 생떼 쓸 나이는 지났을 텐데? 더 우스운 꼴 보이지 말고 그만 해라, 이진환. 지금까지 한 걸로도 충분하지 않나?”'재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진환을 향한 비웃음이 묻어났다.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진환이 아니었다. 저 자식, 가만 안 둬! 진환은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가볍게 어깨까지 으쓱하는 여유를 보였다.'“장난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네 단점이지. 좋아. 내가 좀 유치하게 굴었다고 치자. 하지만 난 궁금한 게 있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체질이라서 말이다, 둘이 연인 사이라면.”'진환이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잡아 두려는 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이 자리에서 증명해 봐.”'광견병 걸린 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진환이라는 남자의 행태에 해주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자존심이 걸렸다는 이유로 저 야비한 남자의 말장난을 웃어넘기지 못하고 응대하는 재훈의 태도 역시 못마땅하긴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쉽게 풀리는 일이 없을까? 그녀의 친구들조차도 정말 해주가 재훈과 사귀기 시작한 건가 하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재인은 거의 해주를 잡아먹을 것 같은 살벌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다. 아, 이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다. 해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재훈이 거의 억양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웃기는군. 내가 왜 그런 걸 해야 하지?”'“왜냐하면 난 네가 말한 대로 유치하고 나잇값 못하는 놈이거든. 누구 덕분에 그렇게 전락해 버렸는데 이곳에 모인 친구들을 위해서 화끈한 여흥꺼리 하나 정도는 보여줘야 체면이 서지 않겠냐?”'“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원하든 원치 않든 이젠 두 남자의 자존심 대결이 되어 버렸다. 재훈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진환을 노려보는 가운데 진환이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말을 툭 내뱉었다.'“키스.”'헉! 곁에서 해주가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자 재훈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사실 어쩌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희극에 뛰어들었을까 하고 어이없는 생각이 들어 확 기분이 상한 재훈의 입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장난이 지나치군.”'“누가 장난이래? 호오, 설마 천하의 백재훈이 아직 거기까지 진도를 못 뺐다는 말은 아니겠지?”'당황한 것이 분명한 두 사람의 반응을 흡족하게 살핀 진환이 재훈의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진환으로서는 이제 두 사람이 연인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자리를 피한다면 평생 백재훈을 놀려먹을 구실이 생긴 것이고 정말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라면 파티에 온 사람들에게 이벤트를 제공하는 셈이니 자존심이 약간 구겨진다 해도 뭐, 괜찮다. 더구나 지금이 아니면 백재훈에게 한 방 먹일 기회는 없을 터였다.'공은 이제 재훈에게로 넘어갔고 두 사람의 흥미진진한 핑퐁 게임을 번갈아가며 구경하던 손님들의 시선 역시 재훈과 해주에게로 향했다.'“저기요, 난……”'해주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무슨 말이든 해서 이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빈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키스라니, 이건 아니잖아!’'해주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재훈과 자신에게로 쏠리자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 든 생각은 자신이 자초한 이 말도 안 되는 해프닝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재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뒷걸음질 치려던 그녀의 발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굳어 버렸다.'“헉.”'그리고 그가 손을 뻗어 관자놀이를 간질이는 머리카락 몇 올을 귀 뒤로 넘겨주고 가볍게 그녀의 뺨을 보듬은 순간 해주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서, 설마……?’'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로 섹시한 미소를 머금은 재훈이 해주의 시선을 움켜잡은 채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순간 시원한 스킨 향과 함께 간지러운 더운 숨결이 훅하고 해주의 얼굴 위로 흩어졌고 긴장과 불안함으로 해주의 까만 눈망울이 흔들렸다.'“신해주.”'재훈이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단순한 속삭임인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해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힘차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의 떨림, 상대를 현혹시키는 강렬한 눈빛 속에 담긴 뜻 모를 한 줄기 감정이 해주를 꼼짝 못하게 얽어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아아,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