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끝 -별의 12월 32일'''''''짧은 노크소리 뒤로 분장차의 출입문이 빼꼼 열렸다. 그 틈새로 이번 송년특집 프로그램의 허드렛일을 담당하고 있는 FD의 앳된 얼굴이 보였다. 정환은 처음 맡은 생방송이 아무래도 신경에 쓰이는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방송 시작 30분전입니다.”''이야기를 뱉어내는 그의 입가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한 허연 입김이 쉴새없이 부서졌다. 게다가 새빨갛게 달아있는 코끝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밖이 꽤 추운가 봐?”''소영은 말을 받으며, 계속해서 얼어붙은 발을 동동 구르는 정환에게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냈다. 기상청에서는 몇 십 년 만에 찾아든 거센 한파라면서 연일 떠들어대고 있었고, 한 번 곤두박질친 수은주는 당최 다시 올라갈 줄을 몰랐다.''“네. 조금 전부터는 바람까지 거세져서 이러다 다들 얼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에요.”''“안으로 들어와. 뜨거운 커피라도 한 잔 할래?”''커피를 권하는 소영을 향해, 정환이 멋쩍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됐어요.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 봐야죠. 안 그럼 동태가 되기도 전에 진수형한테 맞아서 죽을 거예요.”''“진수씨는 좀 어때? 또 혼자 긴장해서 스텝들한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그래?”''소영은 방송시작 30분전만 되면 공연히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목청을 돋우고 돌아다니는 버릇을 가진 AD의 상태를 물었다. 그러자 정환이 이번에는 배시시 옅은 웃음을 지었다.''“아뇨. 오늘은 스텝들이 아니라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중이에요. 미리 설치해놓은 포토라인 안으로 사람들이 자꾸만 밀려들어오고 있거든요.”''“그래? 하긴 오늘 같은 야외 생방송은 어쩔 수가 없어. 아무리 간곡하게 부탁을 해도, 텔레비전에 얼굴 한 번 내비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어딜 가나 한둘쯤은 꼭 있기 마련이거든.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 몸이 제멋대로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거야.”''“암튼 이렇게 추운데 다들 뭐하러 밖으로 기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나 같으면 뜨뜻한 아랫목에다 배 깔고 누워 텔레비전이나 볼 텐데 말이에요. 따뜻한 군고구마라도 까먹으면서요.”''이야기를 하는 내내 혀를 내둘러대는 품새로 보아, 정환은 보신각을 중심으로 이곳 종로와 광화문 일대를 누비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물결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오늘 같이 수은주마저 꽁꽁 얼어붙은 날에는 그의 말마따나 절절 끓는 아랫목이 최고였다. ''그래도 새해가 아니던가. 힘들고 괴로웠던 묵은해를 보내고, 희망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새해를 맞고 싶은 욕심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내년 새해에는 버겁기만 했던 올 한 해에 비해 더욱 풍성한 결실과, 더욱 풍족한 여유가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처럼 말이다. ''“섣달 그믐날이잖아. 오늘 같은 날 종로통으로 안 나오면 언제 나와 보겠어?”''“듣고 보니 것도 그러네요. 그나저나 준비는 다 끝났어요?”''“그럼. 이만하면 언제든 출동 가능한 5분 대기조인걸.”''소영은 분장 전에 미리 건네받은 방송대본을 주섬주섬 챙겨들고서, 정환이 반쯤 열어두고 있는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채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그녀의 옷깃 사이로 차가운 냉기가 매섭게 몰려들었다. 살을 에는 드센 칼바람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모직외투의 앞섶을 단단히 여미는 동시에 어깨마저 잔뜩 움츠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환이 안쓰러운 듯 콧잔등이 위로 잔주름들을 빼곡하게 잡았다. ''“소영이 누나, 그냥 안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방송시작 5분전에 다시 와서 콜해드릴 테니까, 그때 밖으로 나와요.”''“괜찮아. 생방 큐사인 전에 카메라 테스트도 미리미리 해둬야 하는 걸.”'소영은 홰홰 손사래를 지으면서 분장차 밖으로 나왔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어찌나 매몰차던지, 흡사 날카로운 칼날이 온 전신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옷깃을 더욱 더 야무지게 움켜쥐었다. ''“그러지 말고 추운데 차 안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진수형한테 누나 대신 스텝들 중 한 사람을 세우라고 얘기할게요. 누나랑 키만 대충 비슷하다면 그런 식으로 카메라 위치 선정해도 별 무리 없잖아요.”''“이야!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만, FD경력 한 달에 정환이도 이제 모르는 게 없네.”''소영은 정환과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면서 어깨를 슬쩍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추위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그의 광대뼈 주위가 이내 더 붉게 짙어졌다. ''“뭘요……. 지난번 방송 때 진수형이 그러더라고요.”''“일은 많이 배웠어?”''“네. 고마워요. 누나가 소개해 준 덕분에 이번 겨울방학 동안 진짜 좋은 경험을 하는 것 같아요.”''이야기를 마친 정환이 쑥스러운 양 고개를 45도 각도로 슬쩍 틀었다. 소영의 눈에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코끝이 싸하니 아려오나 싶더니만,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 밑창에서부터 울컥울컥 솟구쳤다. 참 많이 보고픈 얼굴이자 동시에 한없이 미안한 얼굴, 그리고 또한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정환의 옆모습과 고스란히 겹쳐 보이는 그 아스라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소영의 흐려진 눈동자 속에서 말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푼 울음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그리고 애써 다정한 미소를 만들었다. ''“생각이상으로 정환이가 잘해줘서 내가 되레 더 고마운 걸. 아까 낮에 잠깐 진수씨랑 이야기를 했는데, 정환이 칭찬이 대단하더라. 형 때문에 힘든 와중에도 어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다고 입에 침이 마르던걸. 진수씨는 지난번 사고소식을 듣고서, 정환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할 줄만 알았다나 봐.”''“소영이 누나?”''정환이 갑자기 말수가 많아진 소영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녀 역시 조용한 대답을 그에게 되돌렸다.''“응?”''“정태형 장례식에는 왜 안 왔어요? 형들이 계속 찾던데…….”''말끝을 흐리는 정환의 가만가만한 목소리에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진한 슬픔이 느껴졌다. 소영은 다시금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내가 그 자리에 굳이 얼굴을 비쳐서 뭐하게. 어른들께도 마냥 죄스럽고, 친구들한테도 죄다 미안하기만 한걸.’''목울대를 깔짝깔짝 건드리고 있는 진실을 대신해서 말도 안 되는 어쭙잖은 핑계가 하나 목줄띠를 타고 넘어왔다.''“그날도 생방이 있었어. 미안해.”''소영의 대답에 정환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왠지 그녀는 계속되는 그의 침묵이 한없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 갑갑한 무게감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부모님은 좀 어떠셔?”''“이제 많이 안정을 찾으셨어요. 한때는 진짜 어떻게 되실까 봐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에요.”''소영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장 한숨에 실려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갑갑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날숨을 내쉬고, 또 내쉬어 봐도 커다란 무쇠덩어리가 명치끝에 내려앉아 있는 것과도 같은 그 묵직한 무게감은 쉬이 가셔지지 않았다. ''“진짜 다행이다. 장례식은 잘 치렀어?”''“네. 연구소 측에서 다 알아서 해 주셔서 저희는 그다지 할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태식형이랑 동준형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었고요.”''“태식이하고 동준이가 고생했겠다.”''소영은 마치 기계처럼 감정 없는 메마른 목소리로 정환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 역시 기계적으로 대답을 했다.''“네.”''그러나 두 사람 모두 겉으로 드러난 침착한 태도와는 사뭇 달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비탄에 찬 슬픔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 간에 말이 없었다.''“채소영씨, 거기서 뭐하고 있어? 카메라 테스트 안 할 거야?”''방송사 AD들 중에서 제일의 목청을 자랑하는 진수의 고함소리가, 둘 사이에 깊게 스며있던 침묵을 일시에 갈라놓았다.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서 그에게 알았다는 표시를 보냈다.''“지금 갈게요.”''“누나, 방송 잘하세요.”''“응. 너도 열심히 해.”''“네.”''형식적인 인사가 오고 갔다. ''소영은 서둘러서 자신의 일로 돌아가는 정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찰나(刹那) - Kenny G의 The Moment''■물망초 - g. o. d의 거짓말''■아름다운 밤 - 윤도현밴드의 아리랑''■함 들어가는 날 - 쿨의 웨딩전야''■남자는 로맨틱한 사건으로 사랑을 기억한다 - 김현성의 헤븐 (Man Always Remembers Love Because Of Romantic Occa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