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탄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방학, 밤중에 잠이 깨 물을 마시러 나왔던 나는 안방 앞을 지나다가 엄마 아빠가 목소리를 낮춰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날 밤 오빠는 친구네서 잔다고 집에 없었다. 방심하셨던 것 같다. 잠꾸러기인 내가 방문 밖에서 경악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이제 다 큰 아들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덮어두고 지내야 할 것인가, 두 분은 근심스런 의논 중이셨다. 나는 충격에 휩싸여 물 컵 든 손을 부들부들 떨며 문에 귀를 대고 들어서는 안 되는 대화를 엿들었다. 우리 오빠가 두 분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다시 말해 나와 혈연관계가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늦어질수록 배신감 느낄 거야. 벌써 늦었지만. 이제 대학 들어가고 하면 지 서류 뗄 일도 있을 텐데 그러다 우리가 친부모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충격 받겠어. 우리가 말을 해 주는 게 나아. 심지가 굳은 애니 잘 받아들일 거야.”'아빠다.'“지금까지 잘 숨겨 오다가 하필 고 3 올라가는 이 시점에?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응?”'이건 엄마다. '그러자 아빠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실은 그 여자가 출소를 했어.”'잠시 침묵.'대꾸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꺼지듯 잦아들며 더 이상은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내 방으로 돌아왔고, 방문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이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순정만화를 너무 많이 봐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말도 안 돼. 엄마 아빠는 항상 나보다 오빠를 위했다. 맛있는 것도 오빠 먼저 챙겨 주고 비싼 학원도 보냈다. 그런데 오빠는 입양한 아들이라고? 아니, 참, 그러면 혹시 나도 입양한 딸인가?'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나는 엄마와 너무 똑같이 생겼다. 아빠와도 많이 닮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식구 중에 오빠만 다르게 생겼네. 오빠는 눈이 크지만 쌍꺼풀이 없고 옆으로 쭉 찢어졌다. 입술도 얇고, 한마디로 상당히 야하게 생겼다. 나머지 우리는 동글동글 강아지 같은 얼굴이다. 진짠가 봐. 우리 오빠가 남이라고?''그 후 한동안 나는 오빠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오빠 얼굴을 들여다보며 지냈다. 결국 엄마아빠는 오빠한테 얘길 했을까? 그런 말을 들으면 분명히 표가 날 텐데. 오빠가 반항하거나 엇나가면 어떡하지? 이전처럼 나를 이뻐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같이 살아온 정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모른 척 하지는 않겠지, 설마? 나는 여전히 오빠가 너무 좋고 오빠 없이는 못 살 거 같은데. 오빠는 달라질까?'만만한 우리 오빠, 내 밥인 우리 오빠, 친구들한테 인기짱이라 내 어깨까지 으쓱해지는 우리 오빠, 공부 잘하고 성격 좋은 우리 오빠. 키 완전 크고 얼굴도 잘생긴 우리 오빠. '어리고 내 생각밖에 못 했던 중 3의 나는 오빠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갈까 그것만 걱정했다. '알 수가 없었다. 오빠 태도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나 아빠나 오빠한테 대놓고 물어볼 일은 아니라, 나는 나름대로 오빠를 시험하기로 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유치찬란한 스타일로.'“오빠, 이어폰 좀 빌려 줘.”'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공부하고 있던 오빠는 고개도 들지 않고 책상 서랍을 열어 이어폰을 꺼내 줬다. 냉큼 이어폰을 받아 챙긴 나는 뒤에서 오빠 목을 껴안고 뺨을 부벼 댔다. 콧소리를 내며. '“고마워.”'겨울밤이었지만 나는 탱크톱만 입고 있었다. 목과 어깨가 다 드러나 맨살이다. 중 3임에도 발육이 빨랐던 나는 어른에 가까운 몸매를 하고 있었다. 방금 샤워를 해서 머리는 젖어 있고 아마 비누 냄새가 날 것이다. 오빠가 나를 더 이상 가족이라고 느끼지 않는다면 내 스킨십에 부담을 갖겠지? 순정만화 뿐 아니라 로맨스 소설도 제법 섭렵하고 있던 나는 이준서가 오빠인지 남자인지 대담한 육탄 공세를 통해 확인하고자 했다. 혈연 분명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대개의 경우 다 큰 남매간엔 그런 신체 접촉은 없다는 사실은 모른 채. '오빠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오빠는 동요하지 않았다.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우리 오빠는 자기 어깨에 얹혀 있는 내 머리칼을 손으로 흐트러뜨리면서 물었다.'“뭐냐, 이은서. 갑자기 웬 필살 애교? 더 바라는 거 있어?”'너무 기뻤던 나는 오빠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고 방을 나왔다.'“그냥, 오빠가 넘 좋아서.”'내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남매다. 오빠는 내 거다, 언젠가 마누라가 생길 때까지는. 결혼하면 시누이 짓 엄청 해야지. 벙긋벙긋 웃음이 나왔다.'그래서 오빠가 미국으로 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물론 울며불며 난리 쳤지만 오빠가 우리 가족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지는 않았다. 공부 잘하고 집에 돈도 있는데 유학 가고 싶겠지. 떡하니 카네기 멜론에 붙은 오빠가 사실 너무 자랑스러웠다. 나는 공부를 그만 못하지만 샘은 나지 않았다. 오빠야, 공부 열심히 하고 근사한 직장 잡아서 나한테 용돈 빵빵하게 줘, 응? ''4년간, 다정하고 따뜻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우리 오빠는 한 번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메일은 꼬박꼬박 보냈다. 가끔 사진도 첨부했다. 때 되면 선물도 보냈다. 하지만 귀국은 하지 않았다. 방학 때도 아르바이트 해야 하고 공부도 너무 바쁘다고 했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서운해 하셨는지. 그래도 두 분은 오빠한테는 내색하지 않으셨다. 나는 오빠한테 티를 많이 냈다. 그래도 모질고 독한 우리 오빠는 우리를 보러 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우리를 더 이상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까. 혹시나. 이제 자립하면 남인 걸까. 나는 가끔 오빠 방에 들어가 혼자 울었다. 오빠가 보고 싶었다.'대학을 들어갔다. 남자 친구도 생겼다. 대학 생활은 무의미하고 즐거웠다. 나는 젊고 예뻤다.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나가듯 줄줄 흘렀다. 오빠가 졸업할 날도 가까워 오고 있었다.'그리고 내 인생에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났다.''5월이었다.'우리 가족은 오빠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두 미국에 다녀오기로 하고 여권이며 비자 수속을 하는 중이었다. 오빠가 세계 굴지의 제약 회사 멀크에 취직되었다고 알려온 후, 졸업하면 돌아오리라 믿었던 우리는 망연자실했지만 차마 오빠의 발목을 잡아 귀국하고 군대 가라고 억지를 쓸 수는 없었기에 일단 졸업식에 가서 얼굴이라도 보며 얘기를 해 보기로 했다.'그날은 훈풍이 부는 맑고 따뜻한 날이었다. '나는 집에서 강냉이를 먹으며 리포트를 쓰고 있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며 강원도에 다녀오신다던 엄마 아빠는 거진 돌아올 시간이 돼 가고 있었다. '그런데 낯선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이름을 대며 가족이냐고 물었다. 경찰서라고 했다.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으니 경찰서로 오라고 했다. 얼마나 다쳤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보이스 피싱인가?'황망하게 경찰서로 달려간 나를 보고 그들은 주저했다. 나보다 어른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삼촌이라든가 숙모라든가. 왜? 시신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그리고 내가 자식이라 충격이 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신이라고? 손이 차갑게 젖어왔다. '“아니요, 제가 직접 확인할게요.”'그 상황에서 삼촌을 부르고 기다릴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지 않았던 나는, 나도 성인이니 괜찮다며 부득부득 직접 확인하겠다고 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나쁜 꿈이다. 입이 마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 시신은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러고 나면 전화가 올 것이다. 엄마가 닦달하겠지, 어딜 갔냐고. 그럼 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모르는 사람들과 그들의 남은 가족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겠지.'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나는 경찰들의 말대로 삼촌을 기다렸어야 했다. '엉망으로 부서진 엄마 아빠의 모습에 나는 정신을 잃고 까무러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