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초입에-첫 서설이 하늘을 무너뜨리다.''''광해군 재위 4년, 임자년(壬子, 1612년) 음력 시월 스무날''''''' 차가운 눈발이 흩날리고 있는 사랑채 마당 한가운데, 의관을 갖춰 입으신 아버지께서 의금부에서 나온 도사(都事)와 나장(羅將)들에게 둘러싸인 채 정좌를 하고 앉아 계셨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계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똑바로 주시하시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서 울음을 참고 계신 듯 하였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술렁이며 소란스러웠던 집 안이 지금은 온통 적막에 휩싸인 채, 눈이 마당에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들려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이 일에 관해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몇 일 전 금부옥사로 끌려가신 할아버님의 일과 크게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이 들뿐이었다.'' 그녀는 안채에서 사랑채로 통하는 일각대문 뒤편에 몸을 숨기고서 마당의 상황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금부에서 도사가 나왔다는 전갈을 받고 급하게 뛰어나가시던 어머니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방을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던 터였다. 만약 어머니께 들킨다면 당신의 말씀을 거역하였다는 이유로 호된 꾸지람을 들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무겁게 몸을 일으키신 아버지께서 주상전하가 계시는 창덕궁을 향해 큰절을 네 번 올리셨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시던 어머니께서 끝내 참고 계시던 울음을 터트리시며 오열을 하셨다. 그녀는 어머니에게로, 그리고 아버지에게 달려가 봐야 된다고 생각하였지만, 두 발이 땅에 얼어붙어 버린 것 마냥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아버지……!’''‘어머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절박함이 그녀의 어린 가슴을 헤집으며, 견디기 힘겨운 고통의 나락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때 그녀의 흐려진 시야에 약사발을 들이키신 후, 피를 토하며 쓰러지시는 아버지의 영상이 크게 확대되어 맺혔다.''“아버지……! 아버지……!”' '“서방님……!”'' 그녀의 간절한 외침이 어머니의 처절한 절규에 소리도 없이 파묻혀 버렸다. 쓰러지시는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시는 어머니를 금부에서 나온 나장이 막아섰다. 나장을 거칠게 밀치신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품에 안아 일으키시고는, 지금껏 그녀가 결코 들어보지 못한 참렬함으로 크게 울부짖으셨다.''“어머니……, 어머니……!”' ' 그녀는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이대로 두면 저들이 어머니마저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 때, 부모님 곁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그녀를 행랑어멈이 강하게 붙잡으며 만류하고 나섰다.''“애기씨, 아니 되셔요! 지금은 선교랑(宣敎郞) 어르신께 가시면 아니 되셔요!”' '“놔! 놔! 이거 놓으란 말야!”' ' 온몸을 비틀어 반항을 하면서 행랑어멈을 때리고 할퀴어 봐도 그녀를 붙들고 있는 강한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가 않았다. 도리어 그녀를 더욱 더 옥죄이면서 행랑어멈이 울음을 터트렸다.''“애기씨……! 아이고……, 애기씨! 불쌍한 우리 애기씨……!”' ' 그 날 아침 일찍, 역모를 꾀한 정2품 전 홍문관 대제학 권화(權和)와 그의 아들 종6품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권흔(權昕)을 삭탈관직 후 사사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었다.'' 그녀 나이 여덟이던 그 해, 첫 서설이 하늘을 무너뜨리며 그렇게 차갑게 내리고 있었다.''''''그대에겐 가인이지만, 첩에게는 낭군이라오.''''광해군 재위 14년, 임술년(壬戌, 1622년) 음력 이월 열 여드레''''''“이제 그만 하면 되었다. 벌써 취기가 도는구나.”' ' 이미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평안감사 국창 박엽(菊窓 樸燁)은 그의 애기 소백주(愛妓 小栢舟)가 권하는 술잔을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거절하였다. ''“나으리, 이 잔 받으시고 소첩의 청 하나만 들어 주시어요.”' ' 소백주가 그의 품 안으로 몸을 기울이며 박엽에게 다시금 술을 권하였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정향이 그의 사내다움을 자극해 왔다. 박엽은 소백주의 부드러운 여체를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더욱 강해진 그녀의 향기가 열락의 문을 향해 손짓하며 그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박엽은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어서 소백주를 품에 안아야 한다는 절박한 욕구로 그의 머릿속이 가득해져 갔다. ''“그래, 청이란 게 무엇이던가? 내 자네가 따라주는 술잔 없이도 들어주도록 하지.”' ' 소백주는 분주하게 손을 놀려 그녀의 옷고름을 풀어헤치는 박엽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제지하며 더 이상의 진행을 막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다소곳한 자세로 흐트러진 매무새를 새로이 가다듬었다. ''“나리……, 나리께서 우리 매향(梅香)이를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매향이를 거두어 달라니? 자네 딸 매향이 말인가?”' ' 박엽이 그녀의 말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평소 소백주가 매향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녀의 말이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예. 이제 매향이도 열 여덟인데, 언제까지 저렇게 댕기 머리로 놔 둘 수가 없어서…….”' ' 소백주가 말끝을 흐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박엽은 갑자기 취기가 확 가시는 느낌이었다. ''“허허, 자네 지금 나에게 매향이의 머리를 얹어주라고 말하는 겐가?”''“예, 나으리. 기생은 머리를 얹어준 첫낭군을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삽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 매향이를 아무에게나 내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진작부터 매향이를 달라는 청은 많이 들어왔습니다마는 왜 이리도 괜찮은 사내가 하나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소백주가 차분한 어조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박엽의 입매가 눈에 띄게 딱딱해져 갔다. 그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강하게 피력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게 그 청을 넣은 것은 자네가 좀 과했네!”' '“왜요? 나리 만한 장부가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어미 심정이야 좋은 서방에게 시집을 보내주고 싶지만, 어디 저나 나나 팔자가 이러하니 감히 꿈도 못 꿀 일이지요. 우리 매향이 저 만하면 인물도 출중하고, 시와 가무에도 능해 가히 천하명기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재색입니다. 나으리, 이년의 소원입니다. 제발, 우리 매향이를 거두어 주시어요.”' ' 소백주가 깊게 허리를 숙여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박엽은 방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녀의 굽은 등을 안쓰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하였다. ''“허허, 관기인 자네는 하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게 안겼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자네가 정인일세. 아무리 양녀라고는 하나, 명색이 정인의 딸을 내가 어찌 안을 수 있단 말인가!”' ' 그 어미와 딸을 함께 취한다는 것은 법도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박엽에게 있어서 소백주는 그의 유일한 정인이요, 연인이며, 가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딸이라면, 그에게도 딸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나으리,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겼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나리께는 소첩이 가인일지 모르오나, 이년에게 있어 나리는 낭군이십니다. 비천한 것이 감히 서방님이라 부르지는 못하였사오나, 진작부터 제게는 나리께서 낭군이셨습니다.”' ' 조아린 머리를 들지 못한 채, 여전히 엎드리고 있는 소백주의 입에서 억눌린 흐느낌이 새어나왔다.''“그런데, 어찌 그런 나를 딸에게 내어줄 생각을 다했는가?”' ' 소백주에 대한 박엽의 서운한 감정이 그의 말속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녀의 흐느낌 소리가 점점 더 깊어져 갔다.''“나으리……! 흑흑흑……! 젊고 아름다운 매향이를 영감께 드리려한 것도, 이년의 나리에 대한 은혜함입니다.”' '“내 언제 자네말고 다른 기녀에게 눈길 한 번을 주던가? 나에게는 소백주 자네밖에 없음을 왜 모르는가! 왜!”'' 박엽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삼키고 있는 소백주를 품 안으로 이끌어 안았다. 강한 팔로 그녀를 바짝 당겨 안으며 지그시 눈을 감는 그의 눈언저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나도 자네를 은혜함이야!”' '“나으리……, 사모합니다! 충심으로 사모합니다!”' ' 소백주가 박엽의 넓은 가슴으로 파고들며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따뜻한 그의 입술이 흐느낌이 새어나오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막아 그 서러운 울음을 삼켰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그의 혀가 입 안 구석구석을 따뜻하게 훑어나가며, 소백주의 모든 서러움과 박엽을 향한 사모의 정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었다. 그 따뜻하면서도 애달프기까지 한 자극에 그녀의 입 안에서 흐느낌 대신 여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에겐 가인이지만 첩에게는 낭군이라오 ''■ 첫 번째 이야기 - 기생으로서 잊을 수 없는 다섯 가지 자격 ''■ 두 번째 이야기 - 돌아보지 않았으나 세상은 곁눈질하였을 거라한다 ''■ 세 번째 이야기 - 성인의 가르침과 하늘이 내린 본성 ''■ 네 번째 이야기 - 님과 함께 누우면 새벽을 잊고, 닭도 울지 않는다 ''■ 다섯 번째 이야기 -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여섯 번째 이야기 - 그대 없는 이 밤, 사무치는 그리움에 잠 못 이루고 ''■ 일곱 번째 이야기 - 어진 낭군 얻어서 행복하길 원하였는데 ''■ 여덟 번째 이야기 - 그였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 ''■ 아홉 번째 이야기 - 눈물은 속절없이 소매를 적신다 ''■ 열 번째 이야기 - 보여줄 수 있는 사랑과 보여줄 수 없는 사랑 ''■ 열한 번째 이야기 - 영원히 그녀만을 바라보겠다는 언약 ''■ 이야기 종결에 - 세상이 무어라 손가락질을 하여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