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의 만남이다. 아영은 조금은 남자답게 인상이 변한 류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쌍꺼풀이 없는 긴 눈매, 시원하게 쭉 뻗은 코, 보기 좋은 입술, 12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각진 턱 선이 그를 소년에서 남자로 보이게 했다. 그는 몸에 피트 된 슬림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꾸준한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라는 것을 아영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류민은 또각거리는 힐 소리에 여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레깅스 아래로 진갈색의 부츠가 보였고 상의는 몸에 피트 되는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큼지막한 보잉 선글라스. 여자가 다가오자 진한 향수 냄새가 물씬 풍겼다.'‘오 마이 갓!’'속으로 저 여자가 국회의원 최윤식의 딸이라는 게 놀라웠지만 민은 일어서서 여자를 맞으며 보기 좋은 미소를 건넸다. 여자가 자리에 앉아 선글라스를 벗어 핸드백에 넣고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진한 화장은 여자를 화려하게 보이게 했고 첫 느낌은 차가워 보인다는 생각이 일단은 들었다. '“안녕하세요. 류민이라고 합니다.”'아영은 민의 평범한 인사에서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실망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그가 웃자, 뺨 한쪽에 보조개가 들어갔다. '‘저 보조개에 한때 환장했던 날이 있었지.’'아영은 의식적으로 미소를 마주 되돌려 주며 인사했다.'“최아영이라고 해요.”'“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민은 한동안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고 옥죄다시피 한 정혼녀를 바라보았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20대 초반만 하더라도 얼굴 모를 그녀의 정체를 민은 증오했었다.'그녀는 참하게 신부 수업을 받느라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들었는데…….'“그런가요?”'민의 생각을 깨고 아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영에게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은 이 자리가 싫어서도 아니고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닌 그저 성격에서 비롯된 도도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요즘 유행한다는 일명 차도녀를 흉내 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뒤따랐지만.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아영은 말없이 호텔 라운지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은 그런 아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영이 갑자기 얼굴을 돌려 민을 마주 봤다.'“왜요? 내 얼굴에서 싼 티 나요?”'‘!’'민은 무례함을 뛰어넘는 여자의 당돌한 말에 몹시 놀랐지만 아영의 차분한 표정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 보였다. '“전혀요. 굉장한 미인이신걸요.”'인공적인 성형의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아영의 얼굴이 예쁘다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민은 빈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저…… 그런데 우리 혹시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민의 말에 뜨끔했지만 아영은 “아뇨, 설마요.”라고 고개를 저었다.'''…중략…'''분위기는 어느새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아니 누군들 실적 안올리고 싶겠냐고요? 왜! 왜 사람을 쪼는데! 어? 지는 얼마나 잘나서……. 그깟 억대 연봉 개나 줘 버리라고 해요. 나도요. 이 바닥 4년차라 잔뼈가 굵은 여자예요. 왜 나를 무시해? 나를…….”'아영은 평소와는 달리 술을 먹으니 확실히 말이 많아졌다. 민은 흥미로운 듯 혀가 꼬여 평소에 내뱉지 않는 거친 말들을 쏟아내는 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붉게 퍼진 기운이 아영을 보다 어리고 청순하게 만들었다. '민은 그런 아영의 얼굴을 실컷 바라보는 중이었다. 자신에게 이런저런 속내를 얘기하는 아영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다만 아영이 너무도 빨리 취했다는 게 조금 불만이랄까. 불판 위의 고기는 처음 놓여 있던 그대로였다. '“민은주 씨가 아영 씨를 그렇게 무시하나요?”'“아, 사실 민은주가 나보다 늦게 들어왔으면서 과장까지 승진하니까 이 여자가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예요. 이 바닥이 실적 따라 승진하거든요. 사실 저도 대리는 달았어야 했는데 그 놈의 실적 때문에…….”'아영의 가냘픈 목이 위태롭게 꺾이자 민은 놀라서 황급히 아영의 두 뺨을 잡아, 들어 올렸다. 아영이 아이처럼 미간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도리도리 저으며 민의 두 손목을 잡아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그 때문에 아영의 몸이 더욱 좌우로 휘청거렸다. 민은 두 뺨의 보드라운 감촉을 떠올리며 아영의 팔이 아닌 뺨을 잡아 다시금 고정시켰다. 볼 살이 밀려올라가며 우스운 표정이 되어 버린 아영은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아영이 다시금 민의 두 손목을 잡아 자신의 뺨에서 떼어냈다.'“잡지 마요. 더워.”'아영이 갑갑한지 폴라 티의 목 부분을 잡아당겨 늘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고 말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술 취한 그녀를 상대로 민은 실없는 말이나 던질 뿐이었다.'“취해도 깍쟁이 같네요. 아영 씨는…….”'민의 나직이 중얼거린 말을 아영이 재차 물었다.'“잘 안 들려. 뭐라고요?”'민이 피식 웃으며 아영을 흉내 낸 듯 고개를 모로 돌리고 새침한 표정으로 그녀를 흘겼다.'“말 안 해줘. 못 들었으면 묻지 마요.”'아영이 그런 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조그마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좋아하던 사람…….”'민은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짝사랑 상대에 대한 언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술만 달싹여 가냘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각하면서 살도 죽어라 빼고 얼굴까지 뜯어고쳤는데, 내가 그랬다는 거 모르잖아요.”'민은 아영을 바라보며 몸에 차오르던 열기가 힘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턱 깎았을 때 얼마나 아팠는지, 나 혼자 자취방에서……. 그 생각하면 아직도 서러워.”'아영이 갑자기 시선을 들어 올리더니 민과 눈을 마주쳐왔다.'“아직도 좋아하나봐.” '아영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떨어뜨린 머리 사이로 한 방울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영 씨! 아영 씨?”'민이 아영의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아영은 젖은 속눈썹을 감은 채 이미 잠들어 있었다. '민은 아영을 업고 주차장까지 걸어가며 생각했다.'‘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그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아영의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남자에 대한 질투심과 패배감으로 민의 전신에 씁쓸함이 퍼져나갔다. '그간 아영을 만나는 것을 거부해왔는데 정작 아영은 그때 다른 남자에 대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몹시도 비참했다.'민은 보조석의 차 문을 열어 아영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녀가 편안하도록 자세를 고쳐 주며 민이 조그맣게 말했다.'“내가 그 사람보다 아영 씨를 먼저 만났더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응? 대답해 봐. 이 아가씨야.” '민이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아영을 바라보며 그녀의 보드라운 볼을 손등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영은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민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아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소주의 달큰한 향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입술만을 탐하는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민은 아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누르면서 그녀에 대한 마음 또한 가슴 깊이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쉬움 속에서 입술을 떼며 아영의 잠든 얼굴을 훑었다. 아쉬운 듯 민이 또 한 번 아영의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가 몸을 떼었다. 일부러 아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민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 예. 김 실장님 늦은 저녁에 전화 드려서 굉장히 죄송해요. 다름이 아니라 최윤식 국회의원님의 자택을 알 수 있을까 해서요.” '김 실장에게서 알아낸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치고 운전을 하며 민은 룸미러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민에게서는 아영을 만나오던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결혼 상대자의 부모를 뵈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흐뭇해졌다. 아영에게서 허락 받은 적은 없지만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어른들에게 어필하는 자신의 이미지는 큰 자신감으로 다가왔다.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은 자신 또한 정략결혼과 상관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왔음에도 아영이 몹시도 괘씸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자신은 그녀의 존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 그녀는 자신과의 미래를 애초에 그려 보지도 않은 듯 앙큼하게 다른 남자를 여태껏 마음속에 품어왔던 것이다. 다소 억울하다고 생각하며 민은 아영의 고양이 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간 자신의 존재를 잊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들였다면 이제부터 자신의 존재를 다른 방식으로 일깨워 주면 된다. '민은 그렇게 다짐하며 아영의 집인 연희동으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