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때때로 생은 생각 외로 흐른다'빨간 카펫이 깔린 차가운 호텔 바닥에 웅크린 혜린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는 짧은 종소리도 느끼지 못했다. 호텔에 설치된 방향제에선 10분마다 피톤치드 향을 진하게 내뿜지만 그녀는 오감이 차단된 사람처럼 멍하니 전경을 응시할 뿐이었다.'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도 친구와 만나기로 한 커피숍에서. 우연히 시선을 돌리니 낯선 여자와 팔짱을 낀 채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현세가 보였다. 혜린은 홀린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악이 담긴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혜린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7층에 정지하는 걸 확인하고 막 출발하려던 옆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하지만 곧 도착한 7층 복도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혜린은 뻣뻣하게 서서 일직선으로 뻗은 복도를 쏘아보았다. 갑자기 길을 잃은 미아처럼 갈 곳을 모르고 멍해졌다. 그때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맙습니다.”'도착한 룸서비스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트레이를 건네받는 남자의 목소리가 친숙했다. 혜린은 새까만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안타까울 정도로 고개를 내저었다.'‘그럴 리 없어.’'혜린은 핏빛 사냥을 나서는 독수리처럼 숨소리를 낮추고 문제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접근했다.'내딛는 발걸음마다 생각 구멍이 숨을 쉬었다.'‘그럴 리 없어. 잘못 보았을 거야. 세상에 당신과 같은 목소리와 얼굴을 가진 남자가 또 있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물론 잊지 않았다. 현세처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잠자고 먹는 것처럼 고맙다는 말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아픈 날 흰죽을 끓여 줘도 고맙고, 회사에서 퇴근해 돌아왔을 때 저녁을 차려 줘도 그렇게나 황송해했다. 하지만 불륜의 현장까지 대령된 룸서비스에 고마워할 남자는 아닐 터다.'혜린은 뱀처럼 차갑고 매끄러운 손잡이를 비틀어 당겼다. 속눈썹이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춤추고 치아가 맞부딪치며 떨렸다.'‘이 우연은 어떤 의미일까?’'잠겨 있어야 할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납작 엎드린 개구리처럼 툭 튕겨져 나간 건 이음새에 끼어 있던 슬리퍼였다. 혜린은 숨을 들썩이며 안으로 향했다. 체리빛 콘솔 위에는 붉은 라벨을 붙인 맥주두 병이 보였고, 뚜껑이 열린 스테이크 접시에선 알싸한 소스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열락을 떠도는 여자의 교성 소리와 함께 피스톤 운동을 반복 중인 남자의 납작한 뒤통수가 보였다.'털썩.'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혜린이 무너져 내렸다. 충격으로 입술에 경련이 시작되었다. 배신감을 머금은 눈물은 빗방울처럼 후드득 옷깃으로 떨어졌다.'‘어떻게…… 당신이 내게…… 이럴 수 있어?’'“아…… 아…….”'시간이 몇 초나 흘렀을까?'은밀한 행위에 빠진 두 사람은 혜린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서로의 몸을 탐닉하기에 바빴다. 달뜬 음성으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속살거렸다. 시간의 흐름을 잊고 멍하니 있던 혜린은 새벽안개처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룸을 나서니 크림색 도어가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닫혔다. 얼굴에 뜨거운 것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투명한 눈물로 얼굴을 도배한 혜린은 영혼을 빼앗긴 인형처럼 엘리베이터를 향해 삐걱대며 걸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칙.'또다시 시간을 알리며 방향제가 뿌려지고 아이보리색 미등이 어둠을 밝히며 켜졌다.'‘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혜린은 손목시계를 응시했다. 5시였다. 윤희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충격으로 주저앉은 후 어느새 20분이 지나 있었다. 그만큼 넋을 잃고 있었던 혜린은 소화전을 짚고 제 것이 아닌 듯 버석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엘리베이터의 사각 버튼을 눌렀다. 1층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을 윤희에게 가야 할지, 아니면 집으로 향해야 할지 알 순 없었지만 우선은 이곳을 떠나는 게 급선무였다. 그녀는 정신이 없어 상하 행 버튼을 모두 눌렀는지도 몰랐다.'1……, 2……, 3……, 5……, 7.'층수 이동을 알리는 붉은 숫자판은 기분 탓인지 거북이처럼 느리게 변했다. 겨우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안에는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남자였다. 혜린은 무자비하게 난도질된 마음이 타인에게 들킬까 봐 일부러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어?”'어지러움을 느낀 혜린에게서 의아함 섞인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타다 말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꾸만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눈앞에 검은 반점들이 나타났다. 눈을 떠도, 감아도 사라지지 않더니 곧이어 그 검은 반점들을 뒤덮으며 보라색 멍울들이 나타났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더니 순식간에 점점이 번지며 시야를 흐리기 시작했다. 혜린은 그것들을 없애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앞은 이미 적자주색 물결로 넘실거렸다.'“뭐지?”'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그 순간, 등줄기를 스친 소름이 오한과 함께 정수리까지 힘껏 치달렸다.'풀썩.'머리끝으로 의식이 송연히 빠져나가자 혜린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퓨마처럼 늘씬한 슈트 차림에 귀찮은 표정을 눈매에 드리운 키 186센티미터의 남자는 눈앞에서 벌어진 뜻밖의 광경에 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서늘한 금속성의 어조로 상대에게 작별을 고했다.'“긴급 상황이니 이만 끊죠.”''주저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린 민혁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잡고 황당한 표정으로 기절한 여자를 응시했다.'‘이 여자, 지브리라도 맞은 건가?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벼락이라도 맞았어?’'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닥에 축 늘어진 여자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온기 없는 안면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이봐요, 내 목소리 들립니까?”'대답이 없었다. 기절한 걸로 보였지만 민혁은 일단 여자의 코끝에 귀를 가져다 대 보았다. 불규칙했으나 다행히 숨소리가 들리자 민혁은 휴대전화를 들고 단축번호를 하나 눌렀다.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최 실장이었다. 신호가 두 번을 가기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네, 사장님.'“7층에 사람이 기절해 있어. 필요하면 구급차를 불러야 할지도 모르니까 적당히 핑계 대고 움직여.”'- 지시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만……주위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민혁은 냉소했다. 물론 허드렛일이야 다른 사람이 해도 무방했기에 최 실장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낯선 타인이 기절했든 말든 일처리를 우선으로 하는 최 실장의 이런 면면은 민혁이 가장 신뢰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런 최 실장의 언사가 귀에 거슬렸다.'“질문은 사양하지. 다 모였나?”'- 미스터 제임스가 길이 막혀 15분 정도 늦을 거라고 연락이 왔습니다.'“시간은 충분하군. 우선 물 한 잔 부탁해.”'- 사장님!'“잊었나? 지시는 내가 내려.”'민혁의 차가운 말투에 최 실장은 꼬리를 내리고 대답했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민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여전히 기절해 있는 품 안의 여자를 쳐다봤다. 빨간 카펫 위에서 그녀를 안고 있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 게이블이라도 된 느낌이었다.'‘그럼 이제 키스라도 할까?’'어이없는 생각에 설핏 웃은 그는 기절해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119 불러야 합니까? 혹시 대답해 주면 안 부르고.”'당연한 일이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차갑고 시원한 것이 목구멍을 적시며 흘러들어왔다. 얼굴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치는 게 느껴졌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다. 아니, 뜨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깨를 흔들었다. 냉기 어린 수건이 얼굴에 덮이자 그녀는 분노가 일었다.'‘그만둬.’'그냥 내버려 두지 않음에 눈을 떴다. 다행히 아까 뒤덮었던 정체불명의 원반들은 사라졌지만 더러운 렌즈를 착용한 것처럼 시야가 흐렸다. 채 정신이 들지 않았는데 이번엔 차가운 물수건이 목을 닦아 낸다. 너무 차가워서 뒷골이 쑤시고 분노마저 인다. 가만히 두라고 화내고 싶은데 입술이 붙어 열리지가 않았다. 그런 혜린의 귓가에 갈 빛을 닮은 목소리 하나가 파고들었다.'“괜찮아요? 정신이, 듭니까?”'혜린은 힘겹게 시선을 들어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왜 모르는 사람이 자기의 안위를 묻는 걸까. 남자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지도, 구급대원처럼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정신이 흐린 와중에도 그가 착용한 구김 하나 없는 슈트는 고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뭐가 어떻게 된 거지?’'돌아가는 상황은 온통 흐릿한데 판단해 줄 이성이 발동하지 않았다. 혜린은 머리를 두드리는 두통이 고통스러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눈 떠 봐요,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면. 당신 기절했었어. 그것도 내 앞에서. 또다시 혼절하지 않으려면 정신 차려야 할 걸.”'나직하면서도 발음이 분명한 그의 말투는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문득 아까 엘리베이터에 미리 타 있던 긴 형체가 떠올랐다.'‘기절했던 걸까? 언제, 어느 틈에?’'그가 읊은 기절이란 말이 혜린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헤집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기절이란 끔찍한 경험을 반복하기 싫으면 당장 눈을 떠야 했다. 그래서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지만 혜린의 눈빛은 초점 없이 멍했다.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맞춘 남자는 선연한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나 보입니까?”'보이긴 했다. 남자는 검고 깊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지만, 그 눈동자는 아까 보았던 새까만 멍울과 닮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은데 남자가 대답을 재촉했다.'“나. 보. 이. 냐. 고.”'혜린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