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년 만에 만난 그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하늘하늘한 갈색머리와 결이 고운 피부는 그대로였지만 조금 더 살이 빠져서 그런지 얼굴은 예전보다 더 날카로운 모습을 풍기고 있었다. 그래도 한 달 정도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았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그의 아버지는 그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다. 좋은 아들이자, 친구라고. 그녀도 그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었다.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젠 아닌 모양이었다. 그 팔 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은 아주 긴 시간이었다. 물론 사람이라면 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변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뚜벅뚜벅. 대리석으로 된 복도를 걸어오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조금 전 납골당 로비에서 보았던 그를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잘 지냈어? 라고 물을 정도의 사이는 더 되지 않았다.'“류란, 오랜만이다?”'천천히 고개를 든 란이 몸을 살짝 틀었다. 화이트 셔츠에 검은색 슈트, 넥타이를 한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두 눈을 슬며시 감은 그를 쳐다보았다. 굉장히 작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서 처음 만났을 땐 연예인 지망생이나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당시 모차르트 콩쿠르에 나가 일위를 했다며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어 란도 몇 번인가 은연 중 그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팔 년 만에 만나 이렇게 쉽게 말을 거는 것을 보니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었는데 괜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천천히 눈을 뜨는 그를 란은 팔짱을 끼고 비딱하게 서서 계속 보고 있었다. 쌍꺼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검은색 재규어가 생각났다. 그가 먼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굉장히 큰 손이었다. 긴 손가락이 한눈에 들어왔다.'팔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이렇게 손을 내밀었었다. 그때 그녀는 어떻게 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란은 그의 손을 살짝 잡고 힘을 주기 전에 빼내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한번 쳐다보고서야 거두었다.'무릎 위까지 오는 검은 치마에 어두운 색의 보랏빛 재킷은 성숙한 모습의 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또각, 하는 구두와 바닥의 마찰음이 적막을 깨트렸다.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그의 존재도 느껴졌다. '춥지도,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은 4월 초. 세상은 봄의 준비를 알리고 있었다. 벚꽃나무에서 솟아나고 있는 초록빛의 새싹이나, 푸른빛의 잔디. 봄의 풍경은 팔 년 전과 비슷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한 게 하나 없는데 그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란은 대리석 계단 위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쉽게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 그녀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겐 오히려 귀찮았다.'“하나도 변한 게 없다.”'란은 말없이 여전히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변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녀는 학교에 얽매어 있던 여고생도 아니었고, 교복을 입은 채 영안실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학생도 아니었다. 하루하루 무료하게 그냥, 살아지니까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었다.'“한눈에 알아봤어. 그 큰 눈도 그대로네. 처음엔 겁먹은 사슴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겁먹은 사슴? '피부가 굉장히 하얗고 눈이 크긴 했지만 그녀는 꽤 이기적이고 차갑게 생긴 편이었다. 오히려 여우같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었다. 오죽하면 딱 하나 있는 친구인 승은은 그녀보고 인간이 아니라 감정 없는 괴물이라는 소리를 했을까.'몸을 살짝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부츠 힐을 신고 있어도 목을 젖혀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장신이었다. '“여전히 예쁘네.”'“오랜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