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예전에 사귀던 여자애들처럼 같은 캠퍼스 안, 지척에 있는 사회과학대 건물로 찾아온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문자는 가끔씩 날아왔는데 문자 내용이 연인에게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단순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달콤한 사랑의 메시지를 받은 것보다도 밋밋하기만 한 그 문자 내용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사귄지 1개월이 지나도록 받은 문자는 총 8개. 아직까지 소개팅 이후로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즐겨 찾는 바(bar) 안에서 친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 때, 강우는 휴대전화를 붙들었다. '5월 3일-[선배님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5월 7일-[이렇게 날씨가 따뜻한데 감기에 걸린 사람도 있더라고요. 선배님도 감기 조심하세요.]'5월 15일-[스승의 날이네요. 교수님께 감사 인사 안하셨다면 한 번 해보세요.]'5월 17일-[교정에 개나리가 폈네요. 그거 아세요? 가을이 되면 캠퍼스 감나무에도 감이 열린대요. 신기하죠? 거름도 안하는데……]'5월 18일-[선배님 즐거운 점심시간 보내세요.^^]'5월 21일-[날씨가 점점 더워지나요? 반팔 입은 사람도 꽤 많네요.]'5월 26일-[도서관이 만원이에요. 다들 학구열들이 대단하네요. 아, 저 재연이에요.]'6월 10일-[선배님 기말고사 잘 보세요.^^]'강우는 재연이 보낸 문자를 차례차례 다시 읽어보았다. 혼자 있을 때면 종종 보는데 오늘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어쩐지 자신과 사귀기로 한 미스터리한 여자가 떠올랐다. 친구들 이야기도 재미없고 그래서 문자를 다시 꺼내 읽는데…… '8이라는 개수의 문자에는 공통적으로 보낸 당사자가 무엇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고 전부 ‘무엇, 무엇 하세요~’, ‘무엇, 무엇이네요.’ 라는 단답형 메시지들만 있었다. 가장 긴 메시지를 강우는 노려보았다. 가을이 되면 캠퍼스 감나무에 거름도 안하는데 감이 열린다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너보다는 보험 들라는 상담 전화가 더 친절하겠다.”'괜히 속이 뒤틀리는 듯한 자신의 감정을 캐치하지 못하는 강우였다. '5월 26일의 문자로 넘어가자 강우는 조금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어보였다. 답 문자를 하지 않고 무시했더니, 글 말미에 자신을 재연이라고 밝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적어도 문자를 보내는 텀(term)이 5일을 넘지 않던 재연이 그 후 문자를 보내고 있지 않았다.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다가도 휴대폰을 한 번씩 만지작거리는 날들이 늘어갔고, 강의 시간에도 이유 없이 휴대폰을 켜놓았다. 그러다가 오늘 재연에게서 15일 만에 문자가 날아왔다. '내용은 다가오는 기말고사 잘 준비하라는 말. '“씨발…….”'휴대폰을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는 강우를, 한창 수다를 떨던 친구들이 바라보았다. '“이강우, 무슨 일 있냐?”'“오빠…… 무슨 일이에요? 나한테 말 해봐요. 가능한 거면 다 들어드릴 테니…….”'바(bar) 안에서 합석한 여자들 중, 한 명이 묘한 기운을 풍기며 강우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강우는 찌푸린 표정으로 여전히 버튼을 앞, 뒤로 눌러가며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야? 오빠? 응?”'여자의 반 토막이 잘린 애교 넘치는 말에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강우는 갑자기 팔을 빼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띠리리리리- '가장 베이직(basic)한 단순한 통화 대기음이 꽤 오래 울리다가 재연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매우 숨죽인 말투였다. '“어디야? 말소리는 왜 그렇게 작고?”'그제야 재연의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커졌다.'“도서관이었는데 방금 밖으로 나왔어요.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강우는 속으로 생각했다.'‘어쩐 일이라…… 너 지금 나를 상대로 밀고 당기기를 하는 거냐? 풋…….’'“나와! 근처인데 캠퍼스랑 가까우니까 튀어와! 여기 블루야.”'“저기, 저…… 시험 준비해야하느라 못 가요.”'여자들의 이런 거절은 익숙했다. 뭐든지 두 번 물어보도록 하는 작전, 일종의 밀고 당기기. 재연의 말에 어딘가 진심이 묻어났지만 강우는 애써 그 느낌을 무시했다.'“두 번 말 안 해. 얼른 와!”'“저 죄송해요. 오늘 정말 곤란해요. 공부할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하고 자리도 겨우 잡아서…….”'강우는 재연의 말에 갑자기 초조함을 느꼈다. 담배를 빼물고 찰칵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30분 내로 와!”'그리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통화가 일방적으로 끝나버리고 자리로 돌아와 보던 책을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재연이었다. 결론은 지어졌는데 자리를 뜨기가 너무도 아쉬웠다. 새벽에 겨우 잡아놓은 도서관 한 구석을 비워주기가 허탈했던 것이다. 고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이제 책을 본지 1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오라니.'''재연이 바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빈이나 석철이 녀석을 비롯한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재연을 맞았지만 강우는 무관심한 척 술을 들이키기만 했다. 친구들이 강우의 옆 좌석으로 안도록 자리를 비켜주자 청바지에 하얀 반팔 티셔츠를 입은 재연이 강우의 옆으로 주저주저하며 앉았다. 재연에게서 청결한 비누향이 풍겼다. '“저 여자 누구야? 오빠?'강우의 왼편에 앉은 여자가 묻자, 강우가 여자를 바라보곤 씩 웃었다.'“네가 한 번 물어봐. 쟤가 누군지…….”'여자는 갑자기 기세등등해져서 재연을 건너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누구세요?”'친구들마저 재연을 주시하며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데 재연이 머뭇거렸다.'“……저는, 이 학교 국문학과 01학번 신재연이라고 해요.”'그러자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키득거렸다. '“물어보면 주민번호까지 알려줄 기세네.”'재연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런 재연을 보자, 왠지 모르게 언짢았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강우였다. 강우가 재연에게 잔을 밀며 술을 따르자, 재연이 얼굴을 찌푸리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돌아가서 마저 책도 봐야하고 무엇보다 온 몸이 녹진한 게 오늘 너무 피곤했다. 재연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저…… 가봐야 해요. 선배님 말씀에 오기는 했는데 제가 여기 온 건…….”'재연의 말을 끊고 친구들이 왁자지껄하게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해댔다.'“그런 게 어디 있어?”'“갈 때 가더라도 술 한 잔 받을 수는 있잖아.”'“그냥 가는 건 진짜 아니지.”'친구들의 강권에 재연은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 독한 양주를 쉬지 않고 쭉 들이키는 것을 보고 강우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재연의 태도에는 분명 자리를 빨리 마무리 짓고 벗어나고자 하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게 누가 봐도 훤히 보였다. '자신과 소개팅 이후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재연이 너무도 못마땅해 강우는 재연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후는 재연이 친구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 세례를 받고 권하는 술을 마다하는 시간이었다. 강우는 친구들에게 시달리는 재연을 아랑곳 않고 묵묵히 술만 마셨다. 분위기가 조금 잠잠해지고 친구들의 관심도 재연에게서 다른 것으로 옮겨갈 무렵, 재연이 강우에게 조그맣게 말했다.'“저…… 가볼게요.”'강우가 재연의 눈을 응시했다. 청순한 얼굴을 하고 어딘지 모르게 풀려있는 눈동자가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강우에게는 지금 재연의 몸 상태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앉아!”'강우의 낮지만 단호한 말에 재연이 울상을 지을 것처럼 찌푸리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 재연을 내버려둔 채 강우가 다른 여자와 말을 섞는데 대화중인 여자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재미있다는 표정을 띠며 건너편을 응시했다. '강우가 고개를 돌리자 앉은 채로 고개 숙여 잠에 빠진 재연이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첫 데이트에서 잠이 든 재연은, 그 뒤로 강우를 만날 때마다 수시로 잠에 빠지는 미스터리한 아이였다. '그날 이후로 강우는 재연에게 정기적으로 전화를 했다. 이 관계에서 자신이 노력하는 역할이라는 게 못내 싫었지만 마음속 깊숙이에서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아이를 알아낼 수 없다고…….'다섯 번째 데이트에서 저녁을 먹고 재연을 차에 태워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는데, 중간에 잠이 든 재연 때문에 웃음도 나오고 또다시 슬금슬금 약이 오르는 강우였다. 일부러 서울 시내를 벗어나 버렸다. 그 동안의 재연을 봤을 때, 강의를 절대 빼먹지 않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내일 재연이 강의를 빠지게 된다 해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의에 빠지게 된 재연의 반응을 어서 빨리 보고 싶었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교외를 벗어나 호수가 근처로 갔을 때는 시각이 꽤 지난 후였다. 군데군데 모텔이 보였고 자신들처럼 정차된 차들이 보였다. 강우는 차를 받쳐놓고 재연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일부러 창도 내리자 귀뚜라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고 제법 찬 밤공기가 자동차 안으로 들어왔다.'그런데 꼼짝도 하지 않는 재연이었다. '“참나…… 뭐하는 애야?”'강우는 잠든 재연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심코 보게 된 재연을 강우는 천천히 응시했다. '하얗고 동그란 이마, 긴 속눈썹, 이마를 자연스럽게 타고 내려와 적당히 높은 콧대와 앙증맞은 콧방울, 그리고 가느다란 턱선 위에 위치한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헐렁한 티셔츠 옆을 사선으로 가로지로는 안전벨트 덕에 가슴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섬세한 손은 무릎 위에 얌전히 놓인 채였다. '강우는 재연을 이렇게 자유롭게 오래 응시한 적이 없었다. 늘 재연보다 앞서 걸었고, 어쩌다 몰래 쳐다보는 것도 재연이 밥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였을 때라, 다른 곳은 볼 수 없었다. '두근.'어느새 강우는 눈으로 재연을 탐하고 있었다. 입술을 빨고 또 빨고, 가슴을 만지며……. '“음, 추워…….”'재연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강우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가 다시 잠잠해진 재연에게로 돌아왔다. 얼굴에는 자신을 향한 어이없다는 표정이 함께였다.'“뭐냐? 이강우…… 너 변태였냐?”'강우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몸을 제법 찬 밤공기에 맡겼다. 문은 활짝 열어둔 채로 차에 기대 담배를 태우는데 안에서 재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어떡해! 이렇게 멀리 오면 어떡해요? 집에 언제 가라고…….”'휴대폰의 시계를 보다가 재연은 바닥에 담배를 던지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는 괜히 심술이 나서 차 안에 들어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아버렸다. '“피곤해서 지금 운전 못해. 한숨 잘 테니 여기서 버텨.”'“선배, 그러지 말고 좀 일어나 봐요.”'몇 번이고 거듭되는 재연의 간곡한 부탁을 강우는 묵살해 버렸다. 잠도 오지 않는데 한 참을 눈을 감고 있다가 문득 옆이 조용해진 것이 궁금해 눈을 살며시 떠 봤다. '재연이 쌔근쌔근 잠이 들어있었다. '“하!”'강우는 너무도 기가 막혀 재연을 노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