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어, 하란이 왔어?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니?”'얼굴에 검은 기름자국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머리 희끗한 중년남자가 열어놓은 차의 후드에서 허리를 펴며 돌아다봤다.'나이 마흔에 얻은 귀한 딸인 하란이 해맑게 웃으며 서있었다. 단정한 교복 차림인 열아홉 살짜리 딸을 바라보는 나이 든 아버지의 얼굴에 가득했던 피곤함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직원들 놔두고 왜 아빠가 차를 손 봐? 그러다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너무 오래된 차라서 내가 직접 손보고 싶어서 그런다, 자식.”'“그래도 힘들게……. 근데 이건 어디가 탈 난 거야?”'하란은 열려있는 후드 안을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눈을 굴려댔다. 여전히 차에 호기심이 많은 딸을 보며 영욱은 카센터 구석 쪽에 있는 수돗가로 걸어갔다.'“점화플러그가 너무 오래돼서 케이블을 갈았어.”'“그래? 우리 차도 얼마 전에 갈았잖아. RV는 승용차보다 엔진의 질이 떨어지는 건가? 엔진소리도 그렇고 차체 떨림도 심하고, 디젤을 사용해서 그런가 봐.”'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하란은 제법 많이 아는 것처럼 엔진을 살펴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큰 자동차회사에서 엔진개발기술자로 있던 영욱이 퇴직을 하고 인수한 정비공장을 놀이터 삼아 놀던 하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유달리 차에 대해서 흥미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만든 차를 꼭 영욱에게 선물하겠다는 신념으로, 카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 미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오늘은 화실 안 갔어?”'“응. 엄마 또 외갓집 갔잖아. 아빠 저녁 챙겨드리려고 일찍 왔지롱.”'수돗가에서 세수를 한 영욱이 하란이 내미는 수건을 받아들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소 짓는 그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팼다.'“그랬어? 아이쿠, 우리 딸처럼 착한 효녀가 어딨을까?”'“그렇지? 아, 아빠처럼 멋진 사람 놔두고 내가 시집을 어떻게 가지?”'하란이 영욱의 팔에 매달려 깡충대며 뛰자, 양 갈래로 길게 땋은 머리채가 어깨 뒤에서 춤을 추었다.'“뭐야? 이 녀석, 죽어도 시집 안 가고 아빠랑 산다더니…….”'“엥? 내가 그랬나?”'짐짓 섭섭하다는 표정을 한 영욱을 보며 웃던 하란이 세월의 무게로 굽어든 어깨에 얼굴을 비벼댔다.'“우리 엄마도 없는데 그냥 저녁 먹고 들어갈까?”'“정말? 음, 난 냉면.”'“또? 냉면 말고 고기 먹자. 허구한 날 냉면이야? 질리지도 않아?”'“칫, 아빠도 냉면이 제일 맛있다면서.”'“허허허, 그래. 냉면도 먹고 고기도 먹자.” '소탈하게 웃는 아버지의 턱 밑에 남아있는 기름 자국을 하란이 손등으로 훔쳐내곤 씩 웃으며 올려다봤다. 둘은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세워둔 구형지프에 올라탔다.''저녁식사를 하고 두 부녀가 느지막하게 어두운 집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거실의 불을 밝히며 하란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엄마는 어째 자식하고 남편보다 외갓집식구가 더 좋은가? 툭하면 안동으로 내려가 버리고 진짜 너무한다니깐.”'종알대며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던 영욱은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하게 정돈된 거실을 쭉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이 깊은 수심에 잠겨갔다.'결혼한 지 25년이 넘었지만, 아내인 수경은 아직도 남같이 겉돌기만 했다. 아내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기에 그저 지켜만 보며 마음만 아파할 뿐이었다.'유교적인 전통을 아직도 고수하는 안동 김씨 종갓집과 제주 고씨인 영욱의 집안은 오래전부터 왕래가 잦았던 사이였다.'일찌감치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큰 자동차회사에 기술자로 다니고 있던 영욱은 열 살이나 차이나는 수경을 그저 예쁜 동생쯤으로만 봐왔었다. 가끔씩 집안 제사나 명절 때마다 안동으로 내려와서 김씨 댁에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들르곤 하던 그는 도도하고 차갑기만 한 수경에게 말 한 마디 제대로 붙여보지도 못했었다.'그러던 차에 수경이 고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나, 제사 때문에 안동으로 밤늦게 내려온 영욱이 친척집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귀가하던 수경이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걸 도와주었다.'영욱은 아직도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구해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자신이 그 때 그 골목을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결국 수경은 한동안 거동도 못할 정도로 앓아누웠지만, 김씨 집안 어른들은 오히려 수경의 행실을 문제 삼아 고등학교만 겨우 졸업시키고 집안에 가두다시피 했었다. 가끔씩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가는 영욱조차도 못 마땅하게 생각할 정도로 꽉 막힌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뒤, 한 3년이 흐르는 동안 집안에 거의 갇혀 살던 수경을 볼 때마다 영욱은 못내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내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영욱은 결심을 하고, 집안 어른들께 부탁해서 수경의 집안에 혼담을 넣었다. 김씨 집안어른들은 마을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단번에 승낙을 하고, 그는 그렇게 수경을 아내로 맞아들였다.'혼담이 오갈 때 영욱은 오랜만에 수경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도도하고 차분한 말씨나 몸가짐을 가진 그녀의 모습이 그에겐 무척이나 새롭게 다가왔었다. 연약한 한 떨기 꽃같이 단아한 그녀의 미모와 모든 것에 사랑을 느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