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하루였다. 그저 희미한 달빛만이 어두운 리샤르 본가를 비추고 있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리샤르 집안의 아들 나단 리샤르가 스물다섯 살이 되는 생일이기도 했다.' “그래. 고마워.”' 나단은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수화기 너머에서 크리스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안해. 오빠. 이런 날은 집에 가야 하는데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아. 정말 공부에 치여 죽는다는 선배들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니까.' 크리스탈의 엄살에 나단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알아. 난 여기서 열심히 놀 테니까 넌 열심히 공부나 해.”' -쳇, 그게 오빠로서 할 말이야? ' “하하하. 그러게 누가 천재 하라고 했어? 너같이 머리 엄청 좋은 천재는 잘 키워 줘야 하는 거야.”' -3년이야. 3년만 지나면 나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 “3년이 뭐 짧은 시간이냐?” ' -자꾸 놀릴래?' 나단은 웃음을 터뜨리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도 대학생이라는 본분에 맞게 책이나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에 책상 앞에 앉았다.' “하하하. 알았어. 잘못했어. 이제 그만 놀고 공부해.”' -휴, 그래야지. 오빠. 선물은 모아서 3년 후에 줄게. ' “기대할게. 끊는다.”' 전화를 끊은 나단은 컴퓨터를 켜고 책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책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필요한 책이 생각난 그는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갔다. 보기에도 지루할 것 같은 두꺼운 책으로 가득한 책장을 둘러본 후 나단은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흔들었다.' “휘유, 우리 학교 공부도 만만찮은데.”' 책장에서 책을 꺼낸 나단은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언뜻 비치는 커튼 사이로 환한 불빛이 보였다. 나단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나단은 분명 정원의 불을 다 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꺼운 커튼을 뚫고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이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응? 분명히 확인했는데. 왜 불이 켜져 있는 거지?”' 나단은 들고 있던 책을 책상 위에 던져두고는 커튼을 휙 걷었다. 순간 나단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환한 불빛은 정원에 있는 조명등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불이었다. 누군가가 정원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 “뭐야? 이런 젠장.”' 나단은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정원으로 나가기도 전에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그의 방이 있는 2층에서 내려다보이는 1층 거실이 온통 불바다였던 것이다. 그 불은 이미 나단의 부모님이 계시는 1층을 송두리째 삼키고 있었다. 심장이 멈춰 버린 듯해 나단은 가슴을 꾹 움켜잡았다.' [어머니! 아버지!]' 거의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나단은 목이 째질 듯이 고함을 지르며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나 아들의 생일 파티를 해준 뒤에 일찍 잠자리에 든 리샤르 부부가 있는 방은 이미 화마로 뒤덮여 있었다. 도저히 문에는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아버지.]' 나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크게 외쳐 불렀다. 그러자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 단…….] '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단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나단. 빨리 여기서 나가라……. 어서…….]' [하지만…….]' [빨리 나가. 어서.]' 나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악을 썼다.' [그럴 수는 없어요. 아버지, 어머니. 지금이라도…….]' 그때였다. 나단 옆에 있던 기둥이 불길에 휩싸여 옆으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불기둥은 당황하고 있는 나단에게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아앗.”' 나단은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기둥 밑에 깔려 버렸다. 그리고 기둥에 붙어 있던 불도 나단의 몸으로 옮겨 붙었다.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은 지독한 냄새에 나단은 비명을 질러댔다.' “헉. 으악.”' 당황한 그는 정신이 나간 듯 몸서리를 치며 제멋대로 불어와 한국어를 섞어 고함을 쳤다.' 나단은 있는 힘을 다해 기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밀어내는 나단의 팔이 거센 불길에 지지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 나단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방으로 가야 했지만 다가가기만 하면 삼켜 버리겠다는 듯 거센 화마가 커다란 거실을 뒤덮고 있었다. ' “아, 안 돼. 안 돼!”'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나단은 잿더미 같은 탁한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기도를 막아 버리자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혼자 집에서 빠져나오고 말았다. ' 나단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뛰어갔다. 맑은 공기가 폐부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부모님이 계시는 방을 쳐다보았다. 무서운 불길이 악마처럼 집을 휘감고 있었다. 그것을 쳐다보는 나단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려 처참하게 찢어진 가슴을 적셨다. ' [아버지. 어머니.]' 나단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어두운 하늘에 깊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