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도 소용없어요. 이 사람, 혼자예요.”'“네에? 그래도 동생이나 형, 친척이라도.”'“제가 알고 있기론 아주 먼 친척 말고는 가까운 친척조차도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건우가 더 가엾게 느껴졌다. 참으려고 했는데, 여주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창민과 재성은 그녀가 무슨 까닭으로 우는지 알 수가 없어 당황했지만 열이 나는 사람을 앉혀 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그럼, 우리 병원이라도 일단 가죠. 비어 있는 병실이 있을 거예요. 일단 거기로 데려갑시다.”'재성의 제안에 창민과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팀장님과 함께 뒷자리에 앉을게요!”'열이 펄펄 끓는 건우가 걱정이 된 여주가 먼저 외쳤다. 이 상황에서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는 자신이 앉을 수는 없어서 창민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의 옆자리에 여주를 앉히고 싶었던 재성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아니, 왜 둘이 같이 앉아?’'여주와 건우가 나란히 앉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재성은 가슴이 울컥거렸다. 창민도 심기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치 자신의 여친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듯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런 생각 하는 것은 너무 오버다.’'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배알이 뒤집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앞의 남자들이 매서운 시선으로 뒷자리를 주시하는 것도 모르고 여주는 열이 펄펄 끓는 건우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열이 너무 높아요. 단순한 감기가 아닌 것 같아요. 폐렴이면 다른 병원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요즘은 한방병원이라고 해서 한방약만 처방하는 게 아닙니다. 양방과 같이 치료하고, 오히려 감기나 폐렴은 한약으로 다스리는 게 더 효과가 좋습니다. 몸을 보하면서 치료하는 거니까요.”'설명해 주는 재성의 목소리엔 자분자분 씹는 것처럼 감정이 들어섰다.'“아, 그런가요? 사실 제가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폐렴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거든요. 단순한 감기로 알고 약만 먹었는데 잘 낫지 않아서 큰 병원에 가서 폐렴이라는 것을 확인했어요.”'단순 폐렴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그 다음에 줄줄이 합병증이 와서 4개월 가까이를 병원에서 보낸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그녀는 건우가 더 안쓰러웠다. 혹시라도 자신의 손길로 건우의 열을 식힐 수 있을까 싶어서 여주는 자꾸 손을 건우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자 갑자기 건우가 그녀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가지 마. 가지 마. 손 놓지 마. 놓지 마.”'열 때문인지 그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헛소리를 했다.'“어머, 어떡해. 많이 아픈가 봐. 김 팀장님, 어디 안 가요. 걱정 마세요.”'여주가 보기에 건우의 모습이 어린애가 엄마를 애타게 찾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녀는 마치엄마가 된 것처럼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건우의 입 꼬리가 웃을락 말락 슬쩍 올라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가까이에 있는 그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앞자리에 있던 창민과 재성이 보고 말았다. 분명 그녀가 한 행동은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인한 발로인데도, 앞에 앉아 있는 두 남자는 질투에 몸이 절절 끓었다.'‘아, 내가 왜 이러지?’'창민은 사귀기는커녕 정식으로 만나 보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향한 마음이 너무 앞서 가고 있는 것이 당황스러웠다.'‘이럴 수가 없어. 말도 안 돼.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데, 이런 바보 같은 마음이 들다니.’'재성 역시 그녀에 대해 별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었는데, 오늘 갑자기 자신의 마음이 바뀌어 지자 무척 혼란스러웠다.'두 남자의 마음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천국을 오가는 남자는 여주 어깨에 기대어 있는 건우뿐이었다. 비록 그의 몸은 뜨거운 지옥을 향해 있었지만, 여주가 걱정하며 손으로 어루만질 때마다 꿈처럼 행복했고 천국이 따로 없었다. 다만, 눈을 뜨지 않고 이 기쁨을 혼자 만끽하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