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갈래, 목장 갈래, 아프리카 갈래?"'아버지가 취기가 올라 걸걸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물었다기보다는 군소리 말고 즉각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그런데 갑작스럽고 엉뚱하게 시집이라니? 목장이라니? 아프리카라니?'아버지가 적잖이 취하신 것이 틀림없었다.'스물다섯에 시집이라니. 일단 시집가라는 말은 완전히 제쳤다. 이렇게 아름다운 스물다섯에 아줌마가 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목장요? 아…… 프리카요?"'소담이 송아지처럼 큰 눈망울을 끔뻑거리며 일부러 겁먹은 얼굴로 되물었다. 겁먹은 척을 해야 아버지가 딸 소담을 측은하게 여기실 터이니까.'소담은 아버지가 취해서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생각했는데…….'취기에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선택해. 지금!"'아버지가 걸걸한 목청에 단칼에 무라도 자를 듯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어이쿠, 장난이 아니었다.'"저기 아버지……."'"지금 당장!"'소담의 참새처럼 작은 입을 꽉 틀어막는 은 회장의 벼락같은 다그침에 소담은 깜짝 놀라 재빨리 예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목장은 과연 어떤 곳인지, 아프리카는 또 어떤 환경인지를 부지런히 가늠해야 했다. 목장이나 아프리카나 마음에 안 들기는 한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조금이라도 신간 편한 곳을 골라내야 했다. 아니, 고르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하지만 왜?󰡑'왜 꼭 목장이어야 하며, 꼭 아프리카여야 하는가. 유배도 아니고 극기 훈련도 아니고 말이다.'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지만 목장도 아프리카도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그냥 한 보름쯤 집 안에서 사회봉사 비슷한 것으로 끝내면 안 되는 걸까? 가령 새벽에 신문 주워오기라던가…… 안 되겠다, 죽어도 새벽에 일어나는 짓은 못하니까. 아니, 싫다!'그럼 설거지? 물론 반 이상 깨트리거나 이를 빠트려 놓겠지만. 깨트리거나 이 빠트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릇은 새로 사면 되니까.'청소기 끌고 다니는 청소라면,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충 끌고 다니며 밀면 되니까.'하여튼 깔끔하고 덜 창피한 것으로 죗값을 대체해야 했다.'󰡐순순히 받아들이면 안 돼. 난 목장도 싫고 아프리카는 더더욱 싫어.󰡑'소담이 슬쩍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별다른 변화 없이 처음처럼 심통 난 모습 그대로였지만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소담이 아니던가.'가련한 표정에 양념으로 눈물 한 방울 곁들여 주며 약한 모습을 보이면 분명히 흔들리고도 남을 아버지였다.'󰡐설마하니 정말로 목장에 보내실까. 아프리카라니, 우리 아버지 유머 감각도 참…….󰡑'"아버지…… 목장도 싫고 아프리카도 싫어요. 무서워요."'소담이 지금껏 백전백승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던 󰡐가엾은 척하기󰡑를 내세우며 징징 우는 척을 했다. 반드시 이번에도 통할 것이라 착각하며.'그. 러. 나!'그것은 착각이었다.'"싫어?"'아버지의 넓은 콧구멍과 함께 콧방울이 실룩거린다 싶더니 일명 호랑이 눈썹이라 불리는, 놀랍도록 시커먼 눈썹 꼬리가 마치 그린 것처럼 천장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그럼 결혼해. 최 회장님 손자 최태혁이하고."'"결혼은 절대 안 해요!"'"왜 결혼은 절대 안 해?"'"난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구요, 우리 집 규칙도 안 지키고 사는데 남의 집 남자 만나 남의 집 규칙 지키면서는 못 살아요."'"우리 집 규칙 안 지키고 사는 건 알고 있냐?"'"……알고는 있어요."'"좋다. 결혼 절대 안 할 거면 목장 가던지 아프리카로 가."'"아버지…… 목장도 싫고 아프리카도 싫다구요. 너무 무섭다구요."'"결혼도 싫고 목장도 싫고 아프리카도 싫으면 머리 밀어."'은 회장이 어금니를 꽉 틀어 문 채 낮게 내뱉었다.'"네?"'소담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뭘 밀라고? 머리를 밀라고? 아유, 우리 아버지 오늘 정말 왜 이러실까.'"확 밀어버려!"'은 회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고 그제야 소담이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은 회장이 비서실장에게 어떤 뜻이 담긴 손짓을 했다. 비서실장이 서재 문을 열어젖히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아버지의 전담 이발사가 바리캉이라 불리는 미용기구를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머리 대!"'"네?!"'"밀어버려. 싹 밀어버려!"'회장님이 명령하자 이발사가 주저하며 소담을 쳐다봤다.'"아버지! 머리를 밀다뇨.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