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으로 얌전히 접힌 쪽지가 탁자 위에 슬며시 놓인 것은 밥이 3분의 1쯤 남았을 때였다.'육개장 국물을 뜨다 말고, 숨은 그 하얀 종이쪽지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쪽지가 무엇이건 간에 뭔가 착오가 있는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방금 그 쪽지를 내려놓고 간 손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3미터쯤 앞에 뒷짐을 쥔 채 서 있던 여자아이가 숨과 눈빛이 부딪치자, 기다렸다는 듯 눈가를 흩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하는 듯 나름 은밀한, 그러면서도 산뜻한 눈웃음이었다.'여자아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 아니더라도, 숨은 그 아이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주인 남자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소릴 듣기 전까지는 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고생쯤으로 여겼었다.'물끄러미 쳐다보는 숨과는 달리, 여자아이는 제법 친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살짝 까딱거려 쪽지를 가리켜 보였다. 잘못 전달된 것이 아니란 얘기다.'여자아이가 또 한 번 상큼하게 웃고는 날름 돌아섰다. 조르르 뛰어가는 여자애의 뒷모습을 좀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숨은 숟가락을 놓고 쪽지를 폈다.''아저씨, 대전 가시죠?'저 좀 태워 주세요.'10분 후에 주유소 앞에서 기다릴게요.''소녀티가 물씬 풍기는 올망졸망한 글씨체를 숨은 잠시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뭐지, 이건? 볼수록 어이가 없었다.'주말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구내식당에서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 그러니까 요즘 여학생답지 않은 아이, 라고 은연중에 짐작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뭐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일도 없었기는 하지만, 여자아이의 앳된 얼굴 그 어디에서도 잔망스러운 면을 찾기는 어려웠던 것이다.'코웃음 치듯 쪽지를 탁자에 도로 내려놓으려던 숨은 저만큼 맞은편, 카운터에 앉은 주인 남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저쪽에서야 그저 스쳐가는 눈길이었겠으나, 숨으로선 공연히 죄라도 지은 것 같은 기분에 종이쪽지를 손안에서 구겨 버리고 말았다.'남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 계산을 하는 짧은 동안에도 숨은 남자와 시선을 맞대지 못했다. 어쩐지 고약한 기분이 들어 입매가 경직되었던 것도 같다.'숨이 식당을 나오도록 여자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광장을 가득 메운 차들을 건너다보며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조심스레 숨의 등을 두드렸다. 여자앤가 싶어 조금 짜증스럽게 휙 돌아보니, 식당 주인 남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채 서 있었다.'“저, 이거.”'남자가 내민 것은 숨의 머플러였다.'“두고 가신 거 맞지요?”'“아, 네. 고맙습니다.”'밥을 먹느라 곁의 의자에 풀어 놓았던 것을 그놈의 쪽지 때문에 잊고 나왔는데, 용케 눈여겨보고선 뛰어나온 모양이었다.'“그럼, 안녕히 가세요.”'허리까지 숙여 친절히 인사를 하는 남자에게 얼결에 숨 역시 깍듯이 몸을 굽혀 인사했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남자를 보며 숨은 후, 숨을 내쉬었다.'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서도 숨은 이내 출발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자신이 지나치게 앞서가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집에 오는 주말이면 거의 늘 들르는 식당이었다. 그러니 여자아이도 제 딴엔 안면이 있다고 부탁을 건넨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가 여기 매여 있으니 나가는 차편을 구하기 곤란하리라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괜히 엉뚱한 짐작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거기까지 생각하다 숨은 고개를 저었다.'만일 그렇다면, 제 아버지를 통해 정식으로 청을 넣는 편이 옳고 안전하다. 몇 번 얼굴을 익혔다고는 해도,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 그것도 남자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런 식의 비밀스런 쪽지나 건네다니.'아마 일하기 싫어 꾀가 나서, 부모 몰래 제 멋대로 철없이 도모한 것임이 분명했다. 더구나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 여자아이의 나이라면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를 즐겁게 돌아다니고 싶을 것이다.'결론을 내린 숨은 그제야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저만치 주유소가 빤히 바라다보였지만, 짐짓 외면한 채 고속도로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