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신촌 한복판 번화가에서 때 아닌 고성이 울렸다. 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고성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에는 파스텔 톤 원피스를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자와 청바지 차림의 남자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둘 다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음직한 앳된 모습이었다. 화사한 차림의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한 기색인데 반해, 남자는 길길이 날뛰기 직전인 듯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몹시 씩씩거리고 있었다.'“그래, 네 말이 맞다! 어쩔래?”'이판사판인 기세로 내뱉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순간 발끈해서 고개를 들었지만 삐죽거리는 입술과는 달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는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왜 아무 말도 못하냐? 왜, 걔한테 했던 것처럼 나한테도 해보지?”'더욱 감정이 뻗치는지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툭 치기까지 했다.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술렁거리면서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섣불리 나서지도 못하고 있었다.'“너 같은 주제가 함부로 해도 될 만한 애 아니야, 알아?”'비웃음 띤 어조에 여자의 고개가 다시 남자를 향했다. 찌를 듯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콧김을 내뿜었다.'“그래서……너 지금 네가 잘했다는 거야?”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성난 기색으로 얘기했지만, 목소리는 감정에 휩쓸려 힘이 없이 안타까웠다.'“양……양다리나 걸친 주제에!”'비틀비틀. 위태롭게 내질러진 한마디에 모여선 사람들은 그제야 남녀 간의 사정을 짐작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청바지 차림에 목에 핏대 세우고 있는 남자가 원피스 입은 여자를 놔두고 다른 여자와 양다리를 걸쳤던 것이다. 사정을 몰랐을 때의 살벌했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주변은 이제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기 시작했다.'“양다리? 그래, 걸쳤다. 나 걔랑 양다리 걸쳤다고. 그게 뭐? 네가 뭔데 걔한테 가서 입방정을 떠는 거야? 주제 파악 좀 해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넌 아무것도 아니야. 알아? 아무것도 아니라고!”'주변에 모여서 있던 아가씨들 사이에서 어머머 하는 분탄성이 터져 나왔다. 화창한 봄날 오후. 김밥 속처럼 사람이 미어터지는 신촌 한복판에서 자기가 양다리를 걸친 것도 모자라 오히려 여자한테 화를 내는 남자의 모습이 그만큼 뻔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는 주변에 아랑곳없이 아예 끝장을 보려는지 오히려 당당하게 소리쳤다.'“눈치도 없냐? 알았으면 조용히 헤어지자고 하던가. 네가 내 마누라라도 돼? 내가 네 남편이라도 되냐고? 눈치 없게 왜 뭉그적거리고 있어, 알았으면 눈치 까고 사라져야 될 거 아냐!”'남자의 힐난에 여자는 자기가 잘못한 것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치맛단만 꼭 그러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남자는 피식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래……넌 생겨먹은 거부터가 싹싹한 거랑은 거리가 멀었지. 생기다 만 콩나물 대가리 같은 게…….”'거침없는 공격에 기어코 여자의 눈에 물막이 피었다. 하필이면 이 커플이 패스트푸드점 문 앞에 자리를 잡고 다투고 있던 터라 때마침 영문도 모르고 밖으로 나서던 손님은 살벌한 분위기에 어쩌지도 못하고 그대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엄청난 인파. 사람이 가득 들어 있는 패스트푸드점 앞. 심각한 분위기의 커플. 그 커플 사이 문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손님.'분위기는 장중했지만 상황은 왠지 우스웠다. 패스트푸드점 안에 있던 사람들도 벽이 통유리인 탓에 밖에서 벌어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 모든 것이 다 귀찮아졌는지 남자는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몇 장을 꺼냈다.'“그동안 용돈 몇 번 준 거 가지고 생색내려고 하지 마라.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야, 그냥 먹고 떨어져.”'여자의 발치 앞으로 만 원짜리 몇 장이 흩뿌려졌다. 그리고 남자는 어떻다는 말도 없이 뒤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든 남자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남아 있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여자와 나동그라진 지폐 몇 장뿐이었다.'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땅바닥에 떨어졌던 지폐가 휘청휘청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걸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여태까지 본 것이 있는지라 지폐가 날아가는데도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타이밍 좋게 문을 나서다가 잠시 갇혀 있던 손님은 처량하게 남겨진 여자를 힐끔거리다가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