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남자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나 할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태영이 얼떨떨함에 멍하게 있는 찬희의 손에서 봉지를 뺏다시피 챙겨 들고는 먼저 저 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멋지게 차려 입은 세미정장에 검은 봉지라. 아이러니하게도 어울리지 않아 보이면서도 보기 싫지 않았다. 차갑던 그가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지는 느낌이라서 일까! 태영은 자꾸만 멀어져 가는데 찬희는 한 동안 사람들 속에 석인 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반면 앞서 가던 태영은 달아 오른 얼굴이 여름 햇살이 더해져서 인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맡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주인장이 정말 찬희에게 누군가를 소개시켜 준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자제할 틈도 없이 목구멍을 타고 나와 버렸다. 그런 마음을 들킬까 도망치다시피 먼저 걸음을 옮겼는데 뒤에서 그녀가 따라오는지 아닌지 알 길이 없는 태영은 최대한 보폭을 줄이며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혼자만 걸어가면 걸어 가다보면 어쩌면 이 많은 인파속에 그녀가 자신을 찾지 못할까봐 태영은 서서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그가 막 몸을 돌리자 거짓말처럼 바로 앞에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든 봉지를 당기고 있었다. 그 덕에 태영의 얼굴은 정말이지 곧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버렸다.'“말도 없이 혼자만 가고. 그러다 서로 엇갈리면 어쩌려고 그래요.”'“그러니까 빨리빨리 와야…….”'“그렇잖아도 저 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달렸다고요. 부산에서 혼자 미아 되는 줄 알았네. 나 길치란 말이에요.”'봉지를 꽉 쥐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찬희가 정말 숨까지 헐떡이며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는 것 같아 보이는 건 자신만의 착각일까? 혼자서 무서웠다는 듯 투정을 부리는 자신이 지켜줘야 될 여자가 가냘프게 서 있었다.'“……경민이랑 혜인 씨 기다리니까 빨리 가야 되니까…….”'“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그렇잖아도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오를 때로 달아올랐는데 이상한 듯 자신을 빤히 응시하며 걱정하는 찬희 때문에 목까지 전염 된 듯 벌겋게 돼 버렸다.'“……뭐, 더우니까.”'“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전혀, 이제 뭐 사러 가야……!”'“아닌데, 너무 뜨거워요. 열이 너무 심하게 나는데.”'여름이고 더우니까 열이 난다는 좋은 핑계가 찬희에게는 통하지 않았는지 쥐고 있던 봉지를 놓고 한 손으로는 자신의 이마를 한 손은 까치발을 들고서 태영의 이마에 살며시 덮었다.'아니라고는 하지만 걱정이 돼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오늘 이상 하리 만큼 처음으로 웃고 이상하리만큼 알 수 없는 말까지 하더니 좀처럼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게 태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자 찬희는 분명 그가 어디가 아파서 혹은 더위를 먹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점점 더 벌겋게 달아오를 리가 없지 않은가.'“열은 무슨…… 그냥 좀 더우니까…….”'“덥긴요, 서울에 비하면 여긴 완전 봄인데. 그리고 보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이게 정상이라고요.”'끝까지 태영이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아 찬희는 그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이마로 향했다. '차라리 그냥 아프다고 할 걸 그랬다. 잔 솜털이 아치형을 그리며 동그랗게 볼록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자 의도하지 않게 한 곳으로 힘이 집중되면서 태영은 서 있기조차 힘들어졌다. '“봐요, 난 적당히 미지근한데 대표님은 지금 바로 계란프라이도 될 만큼 뜨겁다고요.”'“……흐흠, 원, 원래 그럽니다. 여름이면,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여서. 이러다 좀 있음 다시 괜찮아 집니다.”'“정말요?”'대답대신 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담 다행인데 혹시 계속 그럼 그땐 꼭 병원 가보기로 해요.”'‘왜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을 하는 겁니까?’'태영은 괜찮다는 말에도 연신 걱정스런 표정을 거두지 않는 찬희에게 묻고 싶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되돌아 올 답이 겁나서라면 너무 겁쟁이 같지만 지금은 겁쟁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관심을 표현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으니까.'“과일도 좀 사갈까요? 수박이 얼마나 하려나?”'아프면 참지 않고 말 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후에야 찬희는 안심한 듯 다시 시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산에 맞게 이것저것 구입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어느덧 뉘엿뉘엿 6월의 따사롭던 햇살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