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일찍 나온 탓에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서성거리며 이은환을 기다리고 있는데 불쑥 눈앞에 나타난 건 서범진이었다. '아, 이 인간. 안소명이 연애 한 번 하려는 데 끝까지 거치적거리는구나. 나를 보자마자 특유의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내 앞에 다가온 범진이 히죽대며 말했다. '“어이, 안소명! 나 마중 나온 거야?”'“아니거든. 은환 씨 마중 나온 거야.”'“칫, 내 마중은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주제에.”'“넌 뭐 내 마중 나온 적 있냐?”'“출근도 안 하는 주제에. 퇴근 마중을 어떻게 하냐?”'범진이 킥킥대며 손가락으로 내 팔을 찔러왔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그 손을 잡아 떼어내며 말했다.'“됐어, 이딴 걸로 싸우기도 입 아파. 그건 그렇고 너 요즘 안 바쁘냐? 퇴근이 빠르다.”'“지난주에 마감이라고 똥 빠지게 야근했잖아. 이번 주는 한가하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안소명 씨, 친구 말에 귀 좀 기울여 주지 그래?”'“알았어. 기울여 줄 테니까 넌 이제 좀 비켜주시지?”'“기다리는 동안 놀아 주는 친구의 의리를 무시해? '“괜찮거든요. 올라가시죠. 서범진 씨.”'이렇게 빈정대는 관계가 지긋지긋한 적도 많았지만 워낙 굳어진 버릇이라 쉽게 고쳐지진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올라가라고 범진의 팔을 잡고 당겼지만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그가 말했다. '“어우, 오늘은 옷도 신경 좀 썼네? 나 만날 땐 만날 후드 티나 입더니. 이런 옷도 있었냐?”'“신경 긁지 말고 올라가라. 응? 좋은 날이다.”'“아, 맞다, 너 어제 나랑 술 마신 여자애 알아? 넌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화장이 아니라 변신이다. 변신. 크크크.” '“걔 찾아서 걔랑 놀아. 난 이은환이랑 놀 테니까. 알았냐?”'밥 먹자는 말을 거절해서인지 이죽거리는 게 다른 날보다 훨씬 심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남자 만날 때마다 이렇게 놀려댔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정색을 하면서 등을 떠밀자 무표정해진 범진이 말했다.'“야, 너같이 순진한 애는 선수들한테 밥이야. 그러니까…….”'때마침 울린 휴대전화 벨소리에 범진의 말을 끊고 전화를 받았다. 이은환이었다. 다 왔다는 말에 앞을 가리고 있던 범진을 밀어내고 보니 저쪽에서 걸어오는 은환이 보였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도 크게 손을 흔들었다. 범진은 이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은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범진의 어깨를 툭 치고 말했다.'“잔소리 됐고, 나간다.”'범진을 뒤로하고 뛰어가는 내 뒤로 ‘야, 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이은환에게 달려갔다. 부드러운 느낌의 푸른색 진한 티에 살짝 루즈한 청바지를 입고 클래식한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과하지 않게 패셔너블해서 보기 좋았다. '“안녕하세요.”'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이은환에게 짧은 목례로 답하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팔짱 좀 껴도 되죠?”'“네? 팔짱? 저야 고맙죠.”'분명 서범진이 나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는 당당하게 이은환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힐끗 뒤를 돌아봤을 때 서범진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당연히 지켜볼 줄 알았던 그가 보이지 않자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멍하니 뒤를 돌아보고 있자 이은환이 물었다. '“음, 아까 그분 누구세요?”'“네?”'“어떤 남자 분이랑 얘기하고 계시지 않았나요? 아까 전화했을 때 그분 뒤에서 나오시던데.”'“아, 친구. 대학 동기인데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요. 퇴근길에 우연히 만나서.”'“친구 분, 멋지던데요.”'“멋지기는요. 성격은 지랄 같고 정신연령이 삼 세 아동이랑 다를 바 없어요.”'“되게 친한가 봐요?”'차마 그 말에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날 여자로 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친하지 않다고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저분 좋아하시죠?”'빙그레 웃으면서 던지는 그의 말의 의중이 뭔지 몰라서 가던 길을 멈추고 이은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아까 친구 분 얘기할 때요. 투덜거리긴 하셨지만, 뭐랄까. 나는 걔의 단점까지 알지만 우린 결국 친하다는 느낌이랄까. 지금 팔짱 끼겠다고 한 것도 그분 보여주려고 한 거 맞죠?”'이 사람이 작두를 탄 건지, 내가 그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을 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마 후자가 맞겠지. 그의 질문에 부정을 할까도 생각을 해봤지만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긍정의 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저는요. 소명 씨 성격 상 저한테 이유 없이 팔짱을 끼자고 할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이거든요. 물론 진심이라면 저야 고맙겠지만 아직은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아마 저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미안해요.”'“미안은요. 괜찮아요. 어쨌든 지금은 저한테 와줬잖아요.”'“솔직히 얘기하자면요. 좋아한 건 맞아요. 하지만 팔짱을 낀 건 은환 씨를 이용해서 뭔가 엮어 보겠다는 게 아니라, 쟤한테 연애도 못하는 바보 같은 애 취급당하는 게 지긋지긋해서였어요. 기분 바빴다면 미안해요.”'“하하. 이런 거 좋아요.”'“뭐가요?”'“소명 씨가 좋았던 이유가 뭔지 아세요?”'“글쎄요.”'“쓸데없이 솔직한 점이요. 그냥 내숭떠는 여자애들 같았으면 아마 이런 상황에서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말았을 걸요. 다른 남자에게 그런 취급을 당한 게 자존심이 상해서 펄쩍 뛰면서 아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 했겠죠. 요령이 없다면 요령이 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전 그런 사람이 좋아요. 속으로 끙끙 앓는 것보다는 훨씬.”'“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는데요. 뭐 솔직히 여자로서 기쁘진 않네요.”'“제가 보기에 소명 씨 되게 매력적이거든요. 성적으로도 성격으로도. 보통 여자들은 이 둘 중에 하나만 갖고 있는데, 소명 씬 둘 다 갖고 있어요. 저도 남잔데 성격만 좋다고 데이트 신청 못하거든요. 소명 씨, 예뻐요. 제 눈엔 아주 예뻐요.”'예쁘다는 말이 이렇게 즉물적으로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말이었나. 여자는 할머니도 예쁘다고 하면 좋아한다더니 내심 기뻤다. 하지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마워요, 댁도 멋져요, 제가 원래 매력적이에요, 순간적으로 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답을 놓쳤다. '도대체 이런 말을 들을 때 다른 여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당장 검색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이은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나랑 손잡았으니까 이제 다른 남자 손잡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