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이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은 체 못마땅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오자 통로의 벽에 여자가 기대어 서있었다. 분명 아까 얼핏 쳐다보았던 혼자 앉아 술을 마시던 여자였다. 어지러운지 벽에 기대 서 있는 모습이 꽤나 유혹적이었다. 슬릿이 깊게 들어간 검은 타이트스커트 아래로 곧게 뻗은 매끈한 긴 다리가 시선을 끌었다. 몸에 피트된 흰 셔츠블라우스의 단추가 몇 개 풀려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 무심한 해운의 시선을 잡았다. 약간 꺾어진 고개 한쪽으로 흘러내린 굵은 웨이브 진 머릿결이 어깨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꽤나 술을 많이 마셨음에도 투명한 맑은 눈빛으로 의미를 알 수 없게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이 그의 걸음을 붙잡았지만 해운은 피식 그런 그녀의 눈빛에 끌리는 자신을 비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잠시 자신에게 머문 시선을 거두고 그녀 앞을 지나가려 할 때 서연은 자신의 앞을 지나치는 그의 팔을 잡았다. 해운이 자신의 팔을 잡은 여자의 작고 흰 손에서 팔, 어깨, 턱, 눈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작고 이지적인 얼굴에 꽤 커다란 눈. 검고 긴 숱 많은 속눈썹에 덮여 있다가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홑겹의 눈꺼풀 속에 슬픔도 우울도 유혹도 녹아 있는 눈동자가 독특해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자극했지만 해운의 지극히 차가운 말투가 무심함을 가장하고 흘러나왔다'“뭡니까?”'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나? 경험이 없음이 억울하고 충동적인 자신의 행동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저기, 저 좀 데려다 주세요.”'차가운 남자의 얼굴에 기가 죽은 서연은 여기서 물러설 수 없어 작은 목소리로 용기내어 말했다. '남자의 황당하다는 한심하다는 눈빛의 대답을 알아챘지만 서연은 술에 취해 약간 혀 꼬부라진 소리로 다시 말했다. 사실 술은 엄청 마셨고 혀는 꼬부라져 있었지만 민우에게 받은 정신적 배신감에 정신은 여전히 말짱했다. '“완전 개자식한테 실연당하고 혼자 왔는데 제가 너무 취해서 늦은 시간에 혼자 집에 가기가 겁나네요. 도와주세요.”'픽. '해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개자식에게 실연을 당했다…… 실연당하기엔 아까운 외모였다. 남자를 얄짤없이 차버렸다면 오히려 믿을 수 있을 텐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유혹의 냄새를 폴폴 풍기며 애원하고 있는데도 혼자 집에 가기가 겁난다는 이 여자의 어설픈 핑계가 오히려 그녀를 순수하게 보이게 했다. '흔히 술집에서 부딪히는 그런 종류의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흑백의 색깔도 옷의 디자인도 사무적이었고 화장이라든가 분위기가 남자를 유혹하는 일을 즐기는 그런 종류는 분명히 아니었다. 혼자 와서 이기지도 못할 만큼 술을 마시고 자신을 붙잡는 이 여자, 해운은 오는 여자라고 다 환영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지금 자신의 팔을 붙잡은 그녀를 그냥 이렇게 외면하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해운은 자신을 유혹하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분명한 눈빛에 그녀의 턱을 자신에게로 당겨 입술을 맞추었다. 말랑말랑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해운은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문지르다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아 보았다. 부드럽고 촉촉하게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탐색하는데도 움찔하는 그녀라니…… 정말 남자를 유혹할 생각이 있거나 진한 밤을 보낼 용기가 있기나 할까? 해운은 그녀의 흠칫 놀라 뒤로 빼는 턱을 당겨 입술을 입안에 머금고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나긋나긋한 허리를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당겼다. 움찔한 입술을 혀로 맛보다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그녀의 입안을 살며시 훑었다. 자신의 혀가 입 안에 침입하자 멈칫 당황하는 그녀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분명한 작은 혀를 잡아 감고 부드럽게 당겨보았다. 멈칫 멈칫 자기 입안으로 망설이다 빨려오는 부드러운 혀가 분명 키스에 서툴다는 것을 항변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입술을 떼고 해운은 그녀를 자신의 품안에서 살며시 밀쳤다. 분명 헤픈 여자거나 경험이 풍부한 여자가 아니라서 꼭 거절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면 남자의 이기심이라고 누군가 욕을 퍼부으려나? 붉은 립스틱이 입술가에 희미하게 번져 있는 모습이 어린 여자 아이가 엄마 화장품으로 장난을 한 것 같은 묘한 순진한 표정을 연출했다. 어이없게도 잘 모르는 그녀를 당연한 듯 순진하고 순수하다고 품평하는 자신은 벌써 한 눈에 그녀의 포로가 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해운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깨끗이 접혀 있는, 자신의 스킨 냄새가 묻어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술 주변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가만히 얼굴을 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잠깐의 키스로 멍한 표정이었지만 깨끗하고 투명함이 있었다. 해운은 손수건으로 그녀의 립스틱이 묻어있을 자신의 입 주변도 깨끗이 닦았다. '“좋아. 뜻밖에 아주 즐거운 밤이 될 것 같군. 지금 나가서 바로 입구에서 만나지.”'해운은 그녀를 뒤에 남겨 두고 코너를 돌아 자리로 향했다. 해운이 시원한 바다향기와 함께 듣기 좋은 저음에 묻어있는 한 자락의 웃음기를 남기며 지나가자 서연은 여자 화장실 맨 끝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잘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기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부드럽고 뜨거워져 있었다. 아련한 담배 냄새가 묻어 있는 것도 같고 그 남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도 같았다. '-입구에서 만나지. '결정을 내려주는 듯한 남자의 무게 있는 단호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처음에는 망설임. 그의 온기를 잠시 맛본 지금은 흥분. 왠지 민우와는 되지 않던 일이 훨씬 잘될 것 같다는 기대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