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에 놀란 희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코끝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그림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희수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반갑지 않은 뜻밖의 손님이었다. '“꼴 하고는…… 기막혀!”'몇 달 만에 만나 한 인사치곤 지독히도 차고 냉혹했다. '또 시비군. 이제는 너에게 당하지 않아! '희수는 피곤으로 느슨해진 경계심을 바짝 조였다. '“웬일이야.”'“이제는 막 굴러다니기로 작정했니?”'희수는 기막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하경이 무안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누가 할 소리.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그 짝이네. 조금 더 건드리면 나도 참지 않아, 라고. '“웬만하면 관심 좀 끊지? 언제부터 우리가 친했다고. 날 걱정스러워하는 넌 전혀 윤하경 같지 않거든.”'희수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완전한 타인. 언니라는 촌수관계를 떼어버린 지 오래기에 그녀에 대한 존중은 전혀 없었다.'“집안 망신시키지 말라고 했지!”'팔짱을 낀 하경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한심하다는 듯 경멸로 가득 찬 눈으로 희수를 훑어보던 하경은 마구잡이로 걸친 허름한 옷 속에서도 빛을 내고 있는 희수가 눈에 낀 가시처럼 불편했다. '“집안 망신? 엿 같은 소리하고 있네.”'개소리. 하경의 말은 희수에게 개소리였다.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이기에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면 된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오래전에 붙어 버린 습관이다.'“저속한 말투하고는. 역시, 태생은 못 속인다니까. 충고 한마디 해줘?”'“나보다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너 따위에게 충고 따위 들을 생각 없어. 피곤하거든, 시비 걸지 말고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고 사라져 줘.”'희수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눈을 감았다. 지치고 피곤한 몸을 푹신한 침대에 눕히고 싶었다. 누구의 방해도 자극도 받지 않고. 어쩌면 죽음의 여신이 키스하는 순간까지 조용하고 편안한 어둠으로 숨고 싶은지도 모른다고 희수는 생각했다. '“걱정 마. 너 같은 사생아와 길게 붙어 있을 생각 없으니까.”'피곤으로 핏발선 하경의 눈동자에 일순 분노로 인한 섬뜩한 냉기가 감돌았다. '“사생아?”'희수는 마친 듯이 폭발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그칠 것 같지 않은 그녀의 웃음은 삽시간에 멈췄다. '“그 소리가 언제 나올지 궁금했다. 그래도 사생아보다는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려주는 여자가 났다는 소린가?”'“뭐라고?”'“네 꼬리표잖아. 조치는 제대로 하고 있니? 나 같은 것 만들지 않도록 조심은 해야지, 안 그래?”'“이…… 이게!”'말문이 막힌 하경은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안색은 이미 붉으락푸르락 했지만 희수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해 끓어오르는 분을 삭였다. '“누가 그러더라. 이미 넌 창녀나 다름없다고.”'이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희수는 비틀어져만 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당하고 있는 것도 싫었다. '“야!”'분을 이기지 못한 하경이 눈을 치켜뜨고 고함을 질렀다. 곧 드잡이 할 태세였다. '“나한테 눈 치켜뜨지 마. 난 들은 그대로 전해준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귀를 열고 다녀야지.”'“이게 진짜!”'하경은 자기 분에 못 이겨 들고 있던 핸드백을 냅다 던졌다. 내동댕이쳐져 바닥을 팽그르르 돌던 핸드백은 희수 발치아래서 멈췄다. 물끄러미 발 밑 백을 보던 희수는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 계집애야! 말이면 다 인줄 알아!”'하경이의 신경질적인 고함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니, 아직 덜 했어. 들은 그대로 해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