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건조함''''상혁은 때 이른 오후에 현관을 들어서고 있었다. 밤 10시 이전에 집으로 퇴근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오늘은 대만으로 갑작스런 출장이 잡혀 있었다. 비서를 시켜 짐을 꾸려오게 할 수도 있었지만 상혁의 비밀 금고에 있는 극비서류까지 부탁할 수는 없었다. 상혁이 바쁜 걸음으로 집안에 들어서자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안동댁이 주방에서 나오다 상혁을 보고는 식겁을 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듯한 얼굴이 그에게 의아한 생각을 품게 했으나 비행기 시간이 촉박하여 여유가 없었기에, 그저 자신이 예고 없이 갑자기 집으로 와서 저런가 하고 대충 짐작해 버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계단을 올라서, 왼쪽은 자신의 영역이었고, 오른 쪽은 그 여자의 영역이었다. 서로의 영역은 존중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으로 지켜지고 있었지만 상혁은 오늘 따라 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야릇한 신음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남녀의 정사에서나 들릴 법한 비음소리와 거친 숨소리, 묘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상혁은 보기 좋고 판판한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 여자의 침실을 향했다. 긴 손가락을 뻗어 굳게 닫힌 문을 슬그머니 열자 아니나 다를까, 두 개의 살덩어리가 얽혀 쾌락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먼저 상혁을 발견한 것은 똑바로 누워 있던 사내였다. 곱상하고 뽀얀 것이 어지간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상혁을 보자마자 어찌나 놀랐는지, 그 하얀 얼굴이 금세 창백하다 못해 시퍼렇게 변했다. 사내의 위에 올라타 등을 보인 채 창쪽을 향해 있던 그 여자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려 마침내 상혁을 발견했다. '저 눈빛.'상혁은 저 여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아무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허무한 것 같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무표정한 얼굴. 늘 상혁의 가슴 어딘가를 콕콕 쑤시는 듯한 눈빛이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나른하게 말했다.'“문 좀 닫아 줄래?”'상혁은 열었던 것처럼 살짝 문을 닫았다. 잠시 말없이 자신이 닫은 문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출장 준비를 하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계속하자.”'여자의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에 더 놀란 것은 어린 사내였다. '“누, 누구죠? 방금 그 남자?”'“응? 그 사람?”'여자는 피식 웃으며 사내의 고운 얼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내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