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꼭 이래야 하겠어?”'인영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그래, 어서 갖다 줘.”'혜윤은 인영을 재촉했다. 10분 째 인영은 못 간다, 혜윤은 제발 가라, 실랑이였다. '“그럼 네가 가.”'인영은 혜윤을 질책했다. 혜윤은 끓어오르는 속을 누르느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게 되면, 내가 왜 너한테 이 치사한 부탁을 하고 있겠니.”'“너, 다시 생각해 봐. 이건 미친 짓이야.”'“나도 알아.”'“너도 안다고?”'“그래, 나도 안다고!” '혜윤은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달리 부탁할 사람이 있었다면 굳이 인영을 붙들고 이런 낯 뜨거운 상황을 연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영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 두 번, 세 번 혜윤의 얼굴뿐만 아니라 심장까지 뜨겁게 만들었다. '“너, 곧 있으면 졸업반이야.”'그게 지금 내가 하는 부탁과 무슨 상관인데?'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혜윤은 꾹 눌렀다. 부탁하는 마당에 성질을 부릴 수가 없어서였다. 혜윤은 마음속 깊이 ‘참을 인(忍)’자를 세 번 읊조린 다음 두 손을 모았다. '“부탁 좀 하자. 응?”'“아, 쪽팔려.”'인영은 거침없었다. 그게 자신의 매력이라고 주장하는 인영이었다. 인영의 의견에 일부 동의하기에 혜윤은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얼굴에 체온계를 갖다 댄다면, 제철소 용광로가 무색할 온도가 관측될 것이 분명하다고 혜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인영은 투덜투덜 하며 도서관 여자 휴게실을 나갔다. 나는 이 결혼 반대요, 하고 외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혜윤은 인영을 내보내고 나서 휴게실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입은 원피스와 발을 압박하는 하이힐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어색한 화장은 안 하느니만 못하니 립스틱만 살짝 발랐지만, 그마저도 ‘입술만 동동 떠다니는’ 느낌을 지우지 못해 인영을 휴게실로 끌고 들어오기 전 싹 지워 버렸다. 지우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립스틱 바른 모습을 인영이 보았다면, 인영은 아마 아는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오후 6시, 학교 앞 작은 카페는 한산했다. 혜윤은 석 잔째 물을 들이켰다. 그야말로 ‘타는 목마름’이었다. 혼자 우두커니 카페 안에 앉아 있으려니, 몹시 무안했다. 가져온 책은 이미 다 읽어 버렸지만, 혜윤은 괜히 첫 장부터 다시 뒤적였다. 카페에 도착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졸음이 몰려올 지경이었다. 혜윤은 카페의 푹신하고 높은 소파 등에 머리를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혹시 누가 어깨를 흔든다면, ‘명상’을 하던 참이었노라고 주장할 생각이었다. 때마침 다행히도 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여보세요!”'반가운 나머지 목소리가 너무 커졌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혜윤은 최대한 벽 쪽으로 움직였다. 마치 고목나무의 매미인 양 벽에 바싹 붙어 혜윤은 할 수 있는 한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왜 안 와? 전하긴 했어?”'[내가 뭐라고 했냐? 아예 하지 말라고 했지!]'“무슨…… 말이야.”'[내가 차마 내 얼굴 들고 아이스맨한테 갈 수가 없어서 석우 선배한테 전해 달라고 했어. 그랬더니…….]'“뭐야! 야!”'아예 대자보에 써서 교문에다 붙이지 그랬니, 이 망할 것아!'혜윤은 격한 감정을 겨우 눌렀다. 심장이 아프도록 무섭게 뛰어 말할 기운도 없었다.'[지금 중요한 게 그거야! 석우 선배는 네가 고백하는 줄 몰라. 그냥 내가 드릴 게 있다고 전해 달라고 했단 말이야. 네가 준다고 얘기도 안 했어.]'퍽이나 고맙구나. 혜윤은 그 말도 꾸역꾸역 삼켰다.'“그래서!”'[그 싸가지 아이스맨이 근데, 석우 선배한테 전해 달라고 그랬단다! 그럴 시간에 책이나 한 자 더 보라고!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넌 자존심도 없냐고 물었대! 야, 그러기에 내가 진작…….]'혜윤은 조용히 휴대폰 폴더를 닫았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세계로 빠질 지경이었다.'뜨겁고 강렬한 기운이 두 뺨을 뒤덮었다. 눈앞에 주헌의 비웃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잘생긴 얼굴에, 주헌 특유의 비웃음과 조소를 입에 걸었을 것이다. 얼굴에 용암을 뒤집어쓴 듯 뜨겁게 달아올라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무안해도 이렇게 무안할 수 있을까. 너무 무안하고 낯 뜨거워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이대로 땅이 두 쪽으로 갈라져 자신을 삼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밖에 들지 않았다.'혜윤은 천천히 카페를 나섰다. 문득 불어오는 바람이 혜윤의 뜨거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열기를 식혀 주기엔 역부족이었지만, 혜윤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눈이 시큰거렸다.'“넌, 후회하게 될 거다, 강주헌. 이 바보 자식아.”'혜윤은 주먹으로 눈가를 쓰윽 훔치며 천천히 전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들어가면 이 거추장스러운 원피스부터 내다 버려야겠다, 혜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