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조리 빠져나간 회의실엔 그들 둘뿐이었다. 체념한 듯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한나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그는 그녀의 눈앞에 놓인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팽팽하게 조여진 허벅지가 어지럽게 그녀의 눈에 잡혔다. 그가 운동선수인지를 몰랐을 때도 한나가 탐을 내던 그 탄탄한 허벅지.'“분명히 악마라고 생각했지. 갑자기 나타나 뭔가를 가져다줄듯 하다가 오히려 더 큰 수렁으로 밀어버리고 달아난 악마.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강은영이란 여자가 과연 실존인물인지 조차 의심스러웠어……. 과연 안 나타날 만했군. 강은영이 아닌 강한나라……. 대전에 있는 카센터. 혹시 그거 아나? 내가 일 년 가까이 대전에 있는 그 작은 구멍가게만한 동네 카센터까지 다 뒤졌던 거? 어디에도 없었지. 아니 있을 수가 없었던 거겠지. 거기엔 간적조차 없었을 테니까. 안 그런가, 강한나 씨?”'조소 섞인 목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자 한나의 턱이 그의 손가락에 의해 들려졌다.'“대답을 좀 해보시지. 왜 날 가지고 논 건지. 그렇게 사라질 거면서 왜 내게 접근을 한 건지. 아! 오늘도 먼지처럼 그렇게 사라질 텐가?”'“…….”'“당신이 살아야할 둥지를 알아버린 이상 도망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겠지. 어디 한번 도망쳐봐. 그때처럼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아. 한번만 더 사람 물 먹이려 한다면 전부 부셔버릴 거야. 강한나가 지켜야하는 터전을 깡그리 망가트리고 부셔버릴 거야. 당신 때문에 내가 받았던 고통들……. 전부 알게 만들어주지.”'순간 호야가 떠올랐다. 자신의 분신, 그 작은 아들. 그와 동시에 저 남자의 아들.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광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저렇듯 벼르고 있는 남자는 내가 한 짓을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리라. 자신 몰래 아이를 갖고 낳은 것을 안다면. 아…….'한나는 도리질을 쳤다. 이제와 그들의 성을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그 작은 아이를 자신의 잘못으로 풍파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말했잖아요. 잠시 일탈이 필요했다고.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그 기억은 잊어요. 난 이미 다 잊었으니까.”'무덤덤한 한나의 말투에 동혁의 손이 움찔거렸다. 한 번도 여자에게 손을 대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정말 충동을 이기지 못해 손을 날릴 뻔했다. 주먹을 꽉 쥔 동혁은 숨을 고르며 그녀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디밀었다.'“잘 봐. 내가 누군지……. 당신 마음에 대고 한번 물어보지. 정말로 날 전부 잊었는지. 아마 한쪽 어디 귀퉁이엔 분명 내 잔해가 남아있을걸. 그것이 어떤 기억이든 간에 분명 남아있을 거야.”'귀에 박혀오는 음성이 왜 이렇게 지독스럽게 아픈 걸까. 한나는 그를 보던 눈길을 돌려버렸다. '“아뇨. 난 이미 잠시 스쳐지나갔던 남자를 잊었고 내 자리를 찾았어요. 그러니까 괜히 흔들지 말아요.”'“흔들지 말라……. 흔들리겠다는 의미로 들리는군. 내 자리를 찾았다……. 과연 얼마나 좋은 자리기에 내게 그런 상처를 남기면서까지 돌아간 건지. 좋아! 어떤 자리를 찾았는지 두고 보지.”'일어서려 해도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동혁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를 밀치기엔 그를 만진다는 것조차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비켜주시죠. 백동혁 씨.”'유유히 자신을 비켜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뒷모습을 보이는 여자는 그때와는 많이 달라보였다. 뭔가 성숙된 분위기. 아니 흔히 말하는 농염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사랑받는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이리라.'미웠다. 죽일 듯이 미웠다.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더욱 깊숙이 밀어버리고 떠난 그 여자가 정말 견딜 수 없이 미웠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동혁은 이를 악물었다. '네가 날 장난처럼 가지고 놀았을지 몰라도 그 장난이 내겐 가시가 되어 심장에 박혀있지. 너도 겪어봐. 그 고통이 어떤 건지……. 이번엔 내가 널 버려줄 테니까 네가 그 수렁에 한번 빠져봐. 난 지금부터 당신을 있는 힘껏 흔들어버릴 계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