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게 정돈 된 자그마한 집에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여자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 남자. 완전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리에는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공기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멈출 줄 모르는 핏방울들이 더욱 더 압박을 느끼게 만들었다.'“저기…….”'겨우 겨우 용기를 내어 한 마디 꺼냈지만 소파에 앉은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왕 용기 낸 거. 될 대로 대라는 식으로, 리에는 떠듬떠듬 완전한 문장을 하나 만들어 냈다.'“손, 손……. 손, 피가, 아니, 피가, 멈춤 않아서, 안 돼요.”'지금 내가 뭐라고 했지? 자신 있던 한국어 실력이 증발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떤 조사가 맞는 것이었는지, 어떤 단어를 써야 하는지 하얗게 질러 버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 서툰 한국어가 그에게는 어필이 되었는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 서툰 말은 그의 마음까지는 풀어 주지 못했다.'“착각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저 인간이 그렇게 말해도 당신과 혼인신고는 못합니다.”'“…….”'“우습군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어디서 굴러먹은 지도 모를 여자에게 눈곱만큼도 관심 없습니다. 술집에서 어쩌다 눈에 띄어 강신우한테 당첨된 모양인데, 어차피 여기저기서 뒤엉키다 왔겠지요. 아, 그 자식한테 하룻밤 상대라도 되어 준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저 자식이나 잡을 것이지 왜 나한테? 아무리 생각해도 환장할 노릇입니다.”'“…….”'“제발 있던 곳으로 돌아가 주세요. 이러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기분이 언짢아 지니까요. 저는 이 세상에서, 그 인간 다음으로 ‘걸레’가 싫습니다.”'마치 한 판 해보자는 양 할 말을 다 내뱉은 그는 눈앞에서 긴 머리의 여자가 하는 행동에 놀라 잠시 멍해졌다. 조용히 일어선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로 입고 있던 블라우스의 웃 단추에 손을 가져가 하나하나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아래로, 아래로 하나씩 손동작이 움직일 때마다 신혁은 움찔하며 그녀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눈을 꼬옥 감은 리에의 행동은 일방통행으로 직진할 뿐이었다. 마지막 단추까지 풀어버린 그녀는 바로 양 손으로 자신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천을 천천히 아래로 당겼다.'때마침 지기 시작한 해가 주홍색의 입김으로 두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를 지게 만들었다. 겨우 한 장 걸치고 있는 얇은 속옷이 가리지 않은 부위에도 그 햇살은 구별 없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하얀 살결을 완전히 주홍빛으로 물들여 버리기엔 태양의 힘이 모자란 듯 했다. 화사한 하얀색. 리에는 곧 천천히, 그 모습 그대로 신혁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무, 무슨…….”'“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걸레’가 맞아요.”'천천히, 손을 가져간다. 핏방울이 맺혀져 있는, 그 섬뜩한 손으로.'“그렇지만. 저는 비록 걸레처럼 살긴 했어도 다침 사람을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하얀 옷감에 흠뻑 스며드는 붉은색 액체. 아플 텐데. 많이 아플 텐데.'붉게 적셔진 블라우스로 매듭을 꽉 묶고, 마치 보물이라도 다루는 양 천천히 손을 뗐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발, 제발. 제발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기를 몇 번이고 간절히 바라면서.'“보시다시피, 저는 이렇게 아무데서나 옷을 벗을 정도의 쓰레기입니다.”'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고요했다.'“그러니 적선 한 푼 했다 생각하시고, 이런 쓸데없는 인간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세요.”'무엇이든 바치겠어요. 비록 가진 것도 없지만.'“딱 일 년만. 일본인인 제가 한국에 머무를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딱 일 년만 저와 결혼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어느 때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초침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질 때쯤, 리에는 손목을 꽉 거머쥐었다. '“당신은 이곳에 머무를 비자, 나는 나의 연구.”'고개를 든 것은 위에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서로 원하는 것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충분조건인 듯 하군요.”'공중에서 시선이 마주쳤을 때 리에는 느낄 수 있었다.그의 눈빛 속에 숨겨져 있던 작은 결정.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것은…….'“좋습니다. 리에 씨. 당신은 당신의, 나는 나의 목적을 위해서. 결혼하기로 지요. 정확히 1년 후에 이혼하는 조건으로.”'한없이 시리고,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시선. 그 시선을 보면서 리에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살아 내겠어. 나의 목적을 위해서, 내가 10년 동안…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그 사람’을 위해서.'“감사합니다.”'눈에 박힌 ‘얼음의 결정’들을 보며, 리에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