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 40분. 친구들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세 시간도 남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미팅 시간을 최대한 줄인 다음 공항으로 출발한다고 해도 약속시간에 늦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저것 시간을 계산하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무엇보다 아버지인 윌리엄 랭카스터를 제대로 설득해 빠져나올 수 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분명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기숙사에서 반년 만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캐나다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면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를 것이다. 하지만 에릭은 그 지긋지긋한 기숙사를 잊고서, 젊음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캐나다에서의 스키투어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방학 내내 집을 떠나 있겠다는 게 아니라 열흘 정도의 여행이라고 설득하면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도 결국 승낙해 주시리라 믿으면서. 뭐라고 해도 그가 럿셀로지 중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첫 여행이 아닌가! '차가 런던 교외에 위치한 랭카스터 본가로 들어섰다. '늘 그렇듯 무뚝뚝한 표정의 레밍턴 집사가 차에서 내리는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그렇지 않아도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외투를 레밍턴에게 건넸다.'여름방학 때 잠깐 들른 후, 거의 5개월만의 귀향이었지만 집은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연말인데도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고 조심스러웠다. 1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친척들은 집에 안주인이 없어서 집안 분위기가 어둡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천만에, 에릭의 생각은 달랐다. 8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에도 집안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어머니 캐서린 랭카스터에 대해 별다른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화려한 겉치장과 사교활동을 중요하게 여기던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고 상류층 여자들이 으레 그렇듯 하나뿐인 아들을 유모와 가정교사에게 맡겨 버렸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야속함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천성적으로 강인함을 타고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을 익히며 외로움을 달랬다.'현관을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아무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집안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확신했다. 딱딱한 분위기야말로 랭카스터 가문을 잘 표현해 주는 요소였으니까. '서재에 다다른 에릭은 옷차림을 점검한 후 중후한 분위기가 풍기는 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서 들어오라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선 그는 동요를 감추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버지의 체구가 예전보다 더 커진 것처럼 느껴지는 게 불길했다. 과연 무사히 스키 투어에 합류할 수 있을까? '53세의 나이에 정력적으로 자신의 거대한 사업체를 일사천리로 이끌고 있는 윌리엄 랭카스터는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두 다리를 굳건히 세운 채 변함없이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윌리엄은 188센티미터의 큰 키에 단단한 근육, 굵은 뼈대, 우뚝 솟은 콧날, 날카로운 지성이 엿보이는 회색 눈을 번뜩이며 호박색 액체가 채워진 크리스털 잔을 입에 기울이고 있었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