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병원은 처음이신가요?”'간호사인 세연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을 한 여자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의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연은 처음 내원한 사람들이 작성해야 하는 용지를 건네주었다.'2년간 산부인과에서 근무했기에 왜 병원을 찾았는지 표정만 보고도 알아차릴 수 있는 세연이다. 앞에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펜을 놀리고 있는 여자는 임신을 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원치 않는 임신을.'손에 힘이 빠지는지 몇 번이나 펜을 고쳐 잡는 여자를 보면서 세연은 상냥한 눈빛을 보냈다.'‘그렇게 떨지 말아요. 모두 잘될 거예요. 괜찮아요.’'작성을 끝냈는지 조심스럽게 펜을 내려놓은 여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건강보험증을…….”'안 가져왔다는 것이겠지. 세연은 생긋 웃어 보였다.'“요즘은 보험증 가지고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변검사 필요하신가요?”'딱 한마디. ‘임신 여부를 알고 싶은 것이냐.’를 돌려서 물은 것뿐인데 이젠 여자의 입술이 파랗게 질리는 게 눈에 보였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 세연에게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수치심에 가득 찬 여자의 눈빛,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앞으로의 인생이 걸린 일인데 얼마나 떨릴까. 분명 임신임을 확신할 것이다. 세연은 그녀가 차라리 상상임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화장실은 나가셔서 왼쪽 코너 도시면 바로 있어요.”'여자에게 플라스틱 컵을 건네주며, 세연은 목소리에 다정함을 실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착잡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냉정해져. 감정에 쓸리지 말고.”'세연의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혀를 찼다.'저렇게 중절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오는 산모를 볼 때마다 김나미 간호사는 미련하다며 혀를 찬다. 하지만 세연은 내원하는 산모들의 불안과 공포에 떠는 모습에 안타까운 연민이 인다.'축하를 받아야 하는 산모다. 뱃속에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진 불안과 절박함에 떨고 있는 산모의 아픔에 세연은 동화되고 만다. 감정이 섞이면 일하기가 어렵기에 충고하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문의 전화를 두 통쯤 받고 나서야 화장실에 갔던 여자가 돌아와 세연이 건네줬던 컵을 전해 주었다. 그런데 여자의 뒤에 웬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일행이신가요?”'쓰러질 듯한 얼굴을 한 작은 여자의 뒤에 붙어 선, 검은 양복을 입은 장신의 사내가 존재감이 너무도 확실해서 세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둔 것치고는 너무 냉정한 얼굴을 한 남자다. 서른 중반이나 되었을까. 여름인데도 검은색에 가까운 고급 슈트로 몸을 감싼 190이 넘는 키의 남자는 눈매가 날카로운 검은 도베르만 같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드는 남자라니.'살이 붙지 않은 얼굴이 칼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냉정해 보이는 것이 심약한 여자의 상대치고는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행복한 커플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합법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분위기의 남자다. 빼도 박도 못하는 조폭이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중간 간부 정도나 될까. 산모가 협박이나 감시를 당하는 걸까?'“저기, 그게…….”'머뭇거리는 여자의 말을 끊고 남자가 나섰다.'“일행입니다. 검사는 언제쯤 받을 수 있습니까?”'낮게 울리는 음성이 진한 다크 초콜릿을 연상하게 했다.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날카로운 눈이 무심하면서도 한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냉랭한 사내의 눈빛은 절대 사랑을 하는 연인의 그것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한 싸늘함이 전신에서 폴폴 풍겨 났다.'“앉아서 기다리세요. 접수를 받은 순서대로 성함을 불러 드립니다.”'절로 세연의 음성이 냉기를 품었다.'“오래 걸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