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황자 전하께 가겠습니다.”'바람 속을 가르며 흘러나온 여인의 음성은 차갑고도 단정했다. 일말의 감정조차 서리지 않은 채 무감각하기만 한 목소리. 실제로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진 채 그 무엇도 떠올리지 않은 참이었다.'바로 얼마 전, 세자 이지천우(李地天遇)의 화살받이가 되다시피 한 채 거의 죽을 만큼 피를 쏟은 탓이 아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매는 바짝 날이 서 있었고, 부상으로 초췌해진 붉은 입술은 질끈 다물어져 있었다. '거의 부서질 것만 같은 유리꽃, 금방 허물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기둥. 그러나 여인은 한 손에 긴 검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것을 땅에 박아 넣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오랫동안 여인의 얼굴을 응시하던 사내, 태하의 이황자 서문강윤이 입을 열었다.'“그대는 대연국의 고결한 어전호위검(御前護衛劍)이며 세자의 사람이지. 한데 내가 과연 그대를 믿을 수 있겠는가? 내겐 그대가 맹세를 지키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개소리 따윈 집어치워라, 서문강윤! 단월사휘! 당장 이쪽으로 돌아와! 이건 명령이다!”'강윤의 음성이 떨어지기 무섭게 터져 나온 외침은 다름 아닌 대연국의 세자 이지천우의 것이었다. 바로 곁에서 무려 다섯 명의 사내가 붙잡고 있건만 천우는 몇 번이나 거세게 저항했고, 그때마다 하늘이 찢어져라 소리쳤다.'“이…… 당장 놓지 못해! 단월사휘! 대체 지금 뭐하는 거냐! 네놈 한 목숨으로 전부를 살리겠다는 허튼 생각, 당장 버려!”'진휘은이든 단월사휘든, 너는 너다. 세상 단 하나뿐인 나의 너. 네가 여인이든 사내든 이제 그건 중요치 않아. 그런데…… 네가 왜 이렇듯 나를 떠나려는 거냔 말이다……!'천우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켜버린 말들은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바보 같은, 정말로 바보 같은 여자. 예전에는 사내임을 가장하여 그의 심장을 부숴놓더니, 이제는 여인으로서 그의 곁을 떠나려고 한다. 제 수하들에게 명을 내려서 감히 주군인 그를 꼼짝도 못하게 해놓고는…… 태하의 이황자에게 가겠다고 한다. 이게 어디 세상천지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내 검이고 단월가의 후계자다. 잊었나? 한데 네 지금 내 허락도 없이 독단으로 무슨 짓을 벌이는 거냔 말이다!”'처음으로 굳게 다물어져 있던 여인의 입술이 가늘게 흔들렸다.'“일전에 세자 저하께, 제 소원이 무엇인지 말씀드린 바 있을 겁니다. 저는…… 이제 제 뜻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당장 그만두지 못해, 사휘!”'“맹세의 확신이 필요하다 하셨습니까, 황자 전하. 그렇다면 드리겠습니다.”'파사삭……! 날카로운 소음이 허공을 가른 것과 동시에 여인의 긴 흑발이 떨어져 내렸다. 한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을 머리칼이었건만, 그것을 내려다보는 여인의 눈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았다.'저가 움켜쥐고 있던 어전호위의 검을 내던진 여인은 무심히 그녀의 수하를 불렀다.'“풍영, 이것을 단월가에 가져가십시오. 몸을 두고 갈 수 없는 노릇이니 그것으로 하여금 제 죽음을 알리면 될 것입니다.”'“단월사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