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 현은 이른 아침부터 조부, 독고 만수의 호출을 받고 부랴부랴 본가로 향했다. 노환으로 거동조차 자유롭지 못한 조부가 아침 댓바람부터 호출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자, 온몸에 전율이 이는 듯했다. '오늘은 조부가 어떤 식으로 긁어도 성질 죽이고 있을 참이었다. 만들어진 듯 미려한 그의 입술 끝이 위로 향했다.'본가에 도착해 조부의 방문 앞에 선 현은 오는 내내 올리고 있던 입술을 축 늘어뜨렸다. 아무리 오늘이 역사적인 날이 될지라도, 오늘 내일 하는 영감 앞에서 너무 좋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조금은 슬픈 듯도 한 표정을 지으며 노크를 하는 현의 옆에 서서 그 행태를 지켜보고 있던 인천댁이 자그맣게 혀끝을 찼다. 현은 자신의 가슴팍에도 닿지 않는 인천댁을 도도하게 내려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현을 향해 ‘호로 새끼!’라고 외치고 있었다. 현은 그런 그녀를 싹 무시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저 왔습니다.”'창가에 놓인 침상에 누워 간병인에게 나긋나긋한 안마를 받고 있던 독고 만수가 눈을 떴다. 그가 손을 들어 신호를 줌과 동시에 간병인은 익숙하게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현과 눈이 마주친 독고 만수는 주름진 미간을 더욱 찡그려 보였다.'“호로 자식 같으니라고. 참으로 오랜만에 면상을 들이미는구나. 작년 내 생일에 보고는 처음이지?”'아침 댓바람부터 오래 놓고 대뜸 욕부터 날리니, 아무리 성질을 죽이자 마음을 먹었어도 입술이 씰룩 비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게 어디가 오늘 내일 하는 영감의 모습이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현에게 독고만수는 웬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 말을 이었다.'“물장사는 잘 되냐?”'“경기가 뭐 같아서 그저 그렇습니다.”'“꼭 사업 못하는 것들이 경기 탓하더구나.”'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현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뜨는데 독고 만수의 목소리가 다시 귀를 후벼 팠다.'“하긴, 양아치 깡패 놈들이 장사를 해 봤자지, 뭐.”'참……자. 역사적인 날이 될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성질 죽인다. 현은 입 안에서 맴도는 욕설을 가까스로 삼켰다.'“물장사 한다고 다 깡패는 아닙니다.”'“깡패 놈이 제 스스로 깡패라고 하는 것 봤느냐? 하긴, 네놈은 깡패라기보다는 호로 새끼에 가깝지?”'못 참는다!'“썅! 그딴 말이나 하려고 바쁜 사람 불렀습니까? 내 다시는 이 집구석에 발을 디디면 인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