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작년 이맘때쯤 만나던 여자에게 선물로 받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백금 소재의 무광택 라이터는 한쪽 모퉁이에 선우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꽤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건강 생각해서라도 조금 줄여요.”'여자는 라이터를 선물로 주면서 아마 그런 소리를 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도무지 그 여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 달쯤 만났었던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다리가 끝내주었던 것은 선명한데.'“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어유, 담배 냄새. 담배 좀 끊어 주면 안 돼요? 응? 건강에도 안 좋은 것을 왜 죽자고 피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담배에 얼마나 많은 극약성분이 들어…….”'선우는 맞은편에 앉아 짱알거리는 여자를 슬쩍 보고는 천장을 향해 후, 길게 연기를 뱉어냈다. 명치 아래 저 깊은 안쪽에서부터 짜증이 스멀거리며 올라오고 있는 것을 참아 내기 위해 그는 니코틴의 오묘한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여자는 손으로 후려도 앵앵대며 들러붙는 똥파리 같았다. 귀찮고, 시끄럽고, 짜증이 난다. 여자의 잔소리도, 그것을 듣고 있는 자신도, 카페 창밖의 화사한 날씨조차도. '여자는 그의 어머니가 친구의 사돈에 팔촌이라는 한국식 연줄을 타고 특별히 아들을 위해 고른 며느리 감이었다.'어머니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여자는, 짙은 속눈썹으로 감싸인 반짝이는 눈동자가 영리해 보였다. 물론 저 속눈썹의 3할은 심어 놓은 인조모이고, 반짝이는 눈동자는 실명의 위기를 부를지도 모르는 서클렌즈 덕분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몰랐겠지만. 게다가 저 계란형의 얼굴 중심에 오뚝 자리 잡고 있는 코가 결코 자연산이 아니라는 것 또한 모르셨겠지.'하지만 그는, 그 정도의 튜닝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속 좁은 남자는 아니었다. 저 코를 만들기 위해 살을 째고 뼈를 들었다 놓는 고통을 감수했을 여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아량 정도는 언제나 넉넉하다. 그런 그가, 이 여자를 더 참아줄 수 없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바로 저 입.'만나기 시작한 지는 석 달쯤. 열 번쯤 영화 보고 밥 먹고 서울 근교 한적한 곳으로 드라이브 하는 평범한 데이트를 했을 뿐인 저 여자가 지껄여대는 잔소리가, 그를 미치게 했다. 제 딴에는 집안 어른의 주선으로 만난 남자와 석 달이나 데이트를 해 왔으니 충분히 친근한 관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그의 무엇이라도 되는 양 그의 버릇, 기호품, 식성, 스타일에까지 일일이 자기 취향에 맞추겠다고 기를 써 대고 있는 것이겠지.'“선우 씨, 어제는 왜 전화 안 됐어요? 초저녁부터 계속 전원이 꺼져 있어서 걱정했단 말예요. 난 어제 선우 씨랑 데이트하려고 친구랑 저녁 약속도 거절하고 기다렸는데…….”'저 예쁜 입만 좀 다물고 있어 준다면. 그랬다면 그가 크게 거스를 의지가 없는, 오늘내일하는 명줄을 붙들고 있는 조부가 있고, 손 귀한 집의 5대 독자라는 것과 그 조부의 마지막 소원이 증손자를 안아 보는 것이라는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식상한 이유들이 적용되어, 아마 내년 봄쯤엔 그와 주례사를 듣고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