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시작해 볼까?”'보경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했다.'“뭐, 뭘요?”'다짜고짜 시작해 보다니! 지승의 말에 보경은 어리둥절해졌다. 혹 조금 전 자신을 가르쳐야겠다는 그 말인가? 근데 도대체 무얼 가르친단 말인지……? '자신 쪽으로 몸을 틀은 지승은 보경의 검정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헉, 오빠가 갑자기 왜?’'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그로 인해 아까부터 열이 오른 보경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질비질 나오려고 했다. '“보경아.”'다정하게 부르는 그의 음성에 보경은 화들짝 놀랐다.'“네?”'“전부터 느낀 거지만 너…….”'“……?”'“눈이 참 예쁜 것 같다.”'“!”'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을 것 같은 그의 멘트에 안 그래도 붉어진 양 볼이 더욱 빨개졌다.'보경이 동그란 눈으로 지승을 쳐다보자 그녀를 향해 그가 얄궂은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이런 멘트 날리는 녀석 조심해라.”'“네?”'보경은 어리둥절해졌다. 사람의 가슴에 벌렁거리는 멘트를 날려놓고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귀엽다, 순수하다, 몸매가 예쁘다 등등 이런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놈들은 바람둥이일 가능성이 높단 말이지.”'“그, 그런…….”'순간 부풀었던 가슴에 실망감이 들어찼다.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인 그의 눈빛을 받은 보경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은근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저,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보경은 저도 모르게 말이 뾰족하게 튀어나갔다. '“알면 다행이고.”'지승은 뾰로통한 보경의 얼굴을 보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윤보경.”'진중하게 부르는 지승의 목소리에 보경은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할까 싶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난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게 우연이라 생각지 않아.”'“네?”'“시작은 나빴지만 운명은 우리를 행복의 천국으로 인도할 거야.”'뜬금없는 말에 보경의 심장이 또다시 이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양 볼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탈 것처럼 빨갛게 익어갔다. '‘와인에 약이라도 탔나? 오늘따라 오빠가 이상해. 휴,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워?’'쇄골이 보일 정도로 파인 티를 입은 보경의 어깨가 지승의 입에서 야릇한 말이 튀어나오자 움찔거렸다. 지승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즉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자주 쓰는 녀석, 이런 기분 처음이야, 넌 정말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야 등등 이런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는 녀석을 조심하라는 말이지.”'“!”'‘또, 또야? 이그, 윤보경 바보.’'좀 전에도 그런 느끼한 말을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런 말에 반응하다니! 더워진 보경은 손부채질을 해댔다. 보경의 모습에 지승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창가로 다가갔다.'“덥지? 창문 좀 열자.”'지승이 창문을 살짝 옆으로 밀자 정원의 나무와 흙냄새를 간직한 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걸려 있던 커튼이 춤을 추듯 팔랑거렸다. 제법 강한 바람이 부는 모양이었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지금은 잔잔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시원한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벌게진 볼에 닿자 보경은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지승의 입에서 나오는 미묘한 말들로 인해 오늘 보경의 가슴은 들뜨다 못해 터질 정도였다. 더 있다가는 심장마비로 죽을 것만 같았다. 공포 영화로 인한 으스스함은 이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지승의 장난스런 달콤한 말들이 보경의 여린 심장에 콕 박히는 것만 같았다. 이 방에 좀 더 있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자신의 방으로 다시 가고 싶어졌다. 보경이 지승을 향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보경아.”'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지승이 또다시 보경의 곁에 앉았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자 그가 기다란 손가락을 보경의 얼굴로 가져왔다.'“왜, 왜요?”'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보경의 얼굴을 응시함과 동시에 지승의 손가락이 보경의 입술에 닿았다.'“자식, 와인이 입가에 묻었잖아.”'“네?”'지승은 엄지손가락으로 보경의 붉고 탐스러운 입술에 묻은 와인을 살며시 닦아냈다. 그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는 순간 보경은 불에 덴 듯 입술이 화끈거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마비가 온 듯 꼼짝 못하고 그를 쳐다보자 지승은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또?’'역시 좀 전과 같이 남자를 조심하라는 둥의 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이렇게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녀석을 조심해라.”'‘그럼 그렇지.’'보경의 마음은 실망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에서 떨어지자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휴.”'“보경아…….”'지승이 중얼거리듯 낮은 어조로 보경의 이름을 불렀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보경은 이제 안 속는다는 표정으로 그의 눈을 쳐다봤다.'“!”'보경을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보경의 가는 어깨가 가빠지는 숨소리로 인해 들썩였다. '“오빠?”'지승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덮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보경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그의 일렁이는 눈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보경의 열 오른 볼을 쓰다듬었다. '“오빠, 또 무슨 말을 하려고……?”'몇 번이나 지승에게 속은 보경은 이번에도 그의 숨은 계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떨려오는 가슴은 그의 진지한 눈빛에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꿀꺽, 요란하게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보경은 조용히 두 주먹에 힘을 가했다. 그럼에도 쉬이 가라앉지 않는 열기는 아마도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지승의 잘난 얼굴 때문이리라.'10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지승의 얼굴이 멈추었다. '“보경아, 믿기 힘들겠지만……. 처음이다.”'뜬금없는 소리에 보경의 눈이 가늘어졌다.'“그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