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난희의 말을 끊은 은혁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난희가 흠칫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만약 내가 널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그때는 뭐라고 대답할 거냐? 명목상 약혼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면 어쩔 건데?”'자신과 수없이 부딪치고 나서야 어렵게 터져 나온 말, 최소한 놀라거나 진지하게 여겨 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또 장난하고 싶어요? 도대체 얼마나 더 사람을 가지고 놀아야 속이 시원하겠어요?”''전혀 알아주지 않는다.''“때때로 골려먹지 않으면 심심하죠? 아, 됐어요. 그쪽하고 난 모조리 다른 것투성이에요. 너무 달라서 도저히 맞출 수가 없어요. 좋아한다는 둥, 그런 소리로 사람 놀릴 생각 말아요. 어차피 장난이라는 거 다 아니까.”''은혁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난희를 쏘아보는 눈동자가 빛을 모조리 잃었다.''“부탁이니까 서로 싸우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 보내고, 그리고 가요. 시간 채우고 가면 되는 걸 왜 내 주위 사람까지 끌어들여 모욕…… 흡!”''입술이 막힌 난희의 눈이 공처럼 팽창되었다. 대기가 파르르 진동하는가 싶더니 난희의 어깨가 짧게 요동쳤다. 밀착해 온 그의 몸이 난희를 순식간에 벽으로 밀어붙였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순간 무언가 무섭도록 뜨겁고 축축한 기운이 얼굴 전체로 쏟아지며 입술을 강제로 열었다. 혀가 혀를 찾아 뒤섞이는 순간 난희의 몸 전체가 파들파들 떨렸다.''이거…… 놔!'난희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은혁을 밀었다. 민 것도 모자라 걷어찼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동시에 은혁의 몸이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정강이를 그렇게 호되게 찼는데도 그에 대한 반응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러나 난희는 미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한참이나 그를 쏘아보다가 소매로 입술을 사정없이 닦았다. 순간 고개를 번쩍 든 그가 외쳤다.'“하지 마!”''그러나 난희는 입술이 해질 때까지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하지 말라고 했어!”'은혁이 달려드는 순간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눈동자가 새빨개지더니 눈물이 차올라 번들거렸다. 은혁의 걸음이 딱 멈췄다. 그의 가슴 한구석에 또다시 서늘한 바람이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것은 정말이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스스로를 통제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무작정 서늘하고 무작정 허전하고 무작정 텅 비어서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울고 있는 난희 앞에서 새로운 감각이 하나 더 생겼다.'명치끝이 콕콕 쑤시는 아픔이었다. 도무지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쳐다봐 주지도 않는 그녀, 자신의 입술이 닿은 곳을 무자비하게 닦아 버리는 그녀로 인해…….''▶ 목차'10장 거실에 툭 떨어진 고추 '11장 넌 왜 그렇게 담담해? '12장 진지한 마음의 시작, 그것이 수반하는 고통 '13장 부스러기, 떨어져 나가다 '14장 똥줄 탄 강아지, 길고 긴 기다림의 시작 '15장 삼 개월 이상의 시간을 내게 주지 않을래? '16장 제멋대로인 남자가 그리워질 때 '17장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프러포즈 '에필로그 1 - 목숨 건 신혼여행 '에필로그 2 - 괴로워라, 인생살이! 사랑스러워라, 인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