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 5일째.''은은한 달빛에 곁들어진 어둠이 고즈넉하게 잦아든 선실 안, 끼익― 하고 뻑뻑한 문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까만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법 호화로운 선실 안에 무단으로 들어온 검은 인영은 느릿하게 걸어가 푹 가라앉아 있는 침대 옆에 멈춰 섰다.'바람이나 파도마저도 깊은 잠에 든 시각, 에이옌스를 찾아온 칼은 손등으로 살짝 잠든 그녀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하지만 에이옌스는 잠깐 뒤척거릴 뿐, 깨어나는 기색이 없었다.'칼은 소리없는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에이옌스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꽃비 이후 조금은 누긋해지나 싶었더니, 곧 건조한 표정으로 돌아가 ‘선심에 감사합니다, 전하’라고, 또다시 거리감을 두는 게 아닌가. 그리고 떠나온 지 며칠이 되었건만 도무지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례적으로 아멜리타와의 이별 앞에 눈물을 내비칠 때는 그렇게도 애틋하고 인간적이더니……. 정말 이 여자의 뻣뻣함에는 그 누구도 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칼은 잠든 상태에서도 고집스레 등을 돌리고 있는 에이옌스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충동적으로 그녀의 옆자리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여전히 잠잘 때는 죽은 사람처럼 아주 미약한 숨소리만 내쉬는 에이옌스를 조심히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품 안에 말랑하게 차오르는 몸과 온기가 적당히 데운 우유처럼 몽글하고 따스했다.'“음…….”'에이옌스 역시 등 뒤에 와 닿은 온기가 기분 좋은지 무의식중에 나른한 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 하자, 그녀의 등이 칼의 가슴에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거의 칼의 가슴에 기대다시피 한 자세였다.'칼은 충동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얇은 옷감에 감싸인 한쪽 젖가슴을 살포시 손안에 담았다. 잠들 때는 가슴띠를 벗는지 풍만한 살집이 큰 손에 가득 들어찼다. 칼은 기분 좋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약간 변태 같긴 하다만, 이렇게라도 그녀의 몸을 느끼니 갈급한 욕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눈앞에 훤히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서도 안을 수 없다니,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잔인한 고문이었다.'철옹성도 이만한 철옹성이 없고, 난공불락도 이만한 난공불락이 없었다. 겨우 함락시켰다 싶었는데, 그 한 번 함락당한 것 때문에 다시 견고한 성벽을 두르니 경계 태세가 엄청났다. 만약 그에게 대공이라는 신분이 없었다면 여러 번 목이 날아가고도 남았으리라. 그 때문에 대공이라는 신분이 고마워지다니, 자신이 대공이라 그녀가 거부하는 것인데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제발 적당히 하자.’'칼은 달아오른 몸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저도 모르는 사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품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을 얻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