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줄래?”'“지금까지 내가 한 말, 못 들었다고 하고 싶은가 보죠?”'“그런 건 아니지만…….”'“뭐, 다시 하지 못할 이유도 없죠. 다시 말해드려요? 나, 진석 오빠랑 잤어요.”'청천벽력 같은 소리.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을까? 더없이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3년을 만나오는 동안 성관계를 요구한 적도 없었고, 그런 의사는 조금도 내비친 적이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후배라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잤다고……?'“그러니까 헤어져주세요. 오빠가 그쪽 때문에 굉장히 고민하는 중이거든요.”'갓 스무 살이 되었을 법한 여자아이의 말. 은하는 아무런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더 당당해야 했다. 3년이나 그를 자신의 사람이라 믿고 의지했던 그녀인 만큼 더 당당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뭔가 달라진 것 같기는 했다. 그것이 다 이 여자아이와의 일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그를 둘러싸고 있던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배신감. 그것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배신감이었다.'“어? 은하야. 여긴 웬일이야? 내가 연락한다고 했잖아.”'학교 근처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진석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오피스텔 문 앞에 검은 그림자가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 싶어서 살펴보았더니 자신의 연인이었다. 얼마 전에 자신이 연락하겠다고 분명 말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온 은하의 모습에 놀란 것이었다. '센서의 불이 들어오고 은하의 표정을 읽은 그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배신으로 인한 실망, 그리고 신뢰의 무너짐. 이 모든 것이 은하의 표정에 나타나 있었다.'“나한테, 할 말 없어?”'“무슨 할 말?”'“다시 한 번 물을게. 정말, 정말로 나한테 할 말…… 없어?”'은하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서 진석은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몸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예쁘더라. 그래, 정말 예쁘더라.”'“은하야, 너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하자.”'“정말 예쁘더라. 나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하더라.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그랬으면 나 바보처럼 연락 안 된다고 걱정하지도 않았을 거고, 너도 마음고생 안 했을 거 아니야.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아니지, 나한테 어떻게 무슨 핑계로 헤어지자고 할지 고민하면서 얼마나 나 비웃었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