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재형은 태경의 패거리들을 피해 잠시 추수를 마치고 쌓아둔 볏짚 단 속에 숨어 있었다. 논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찬바람도 볏짚 단 속의 훈훈함을 식히지 못했는지 재형은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부스럭거리며 볏짚 속에서 기어 나왔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 앉아 있었다. 아홉 살의 소년은 어둑어둑한 논길을 따라 걸으며 환한 마을을 쳐다봤다. 뱃속이 텅 빈 게 허전했다. 오전에 어머니를 찾아온 김형윤이 보기 싫어 점심도 거르고 하루 종일 밖에 있었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노는 아이들이 없는 걸로 봐선 다들 저녁 먹으러 들어 간 것 같았다. 재형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로 들어서며 애꿎은 돌멩이를 뻥 차며 작게 중얼거렸다.'“죽었으면 좋겠어! 김형윤, 죽었으면 좋겠어! 김형윤 식구들 모두 죽었으면 좋겠어!”'재형의 가슴속에서 증오라는 작은 가시가 단단히 박혀있었다. 재형은 털털 걸어 마을의 가장 변두리에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재형은 엄마를 부르려다 댓돌에 놓인 신발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재형의 눈동자에 작은 불길이 솟아올랐다. 창호지문 너머에서 소곤거리는 어른들의 소리가 들렸다.'“재형이가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아요. 찾으러 나가야 할까 봐요. 점심도 굶었는데.”'‘날 기다리기나 한 거야.’'재형은 소리치고 싶었지만 금세 어머니의 큰 눈에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늘 그렇듯 꾹 참는다. 대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김형윤을 미워하는 게 더 편했다. 김형윤이 없었다면 엄마는 첩살이 같은 것은 하지 않을 테고 김형윤의 본처와 자식들에게 멸시와 구박 따위 받지 않을 텐데.'“노느라 정신없는 거겠지. 그 나이 사내애들 다 그렇지. 그만 가리다.”'김형윤이 일어나 재킷을 챙겨주는 재형의 엄마를 다시 한 번 안는 것이 창호지에 비쳤다. 재형은 입술을 깨물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재형의 귀에 김형윤이 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와 한참을 마당에서 서성이는 엄마의 발자국소리가 들렸지만 재형은 그냥 부뚜막에 앉아 모르는 척했다. 다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재형은 묵묵히 검댕이가 잔뜩 묻은 부지깽이로 바닥에 낙서를 했다. 엄마, 미워 라고 몇 번 쓰던 재형은 발로 막 비볐다. 엄마가 보기라도 하면 안 될 것 같아 그 위에 숯으로 잔뜩 뭉갰다. 그리고 가마솥을 열었다. 뜨끈한 고구마가 들어있었다. 재형은 두 개를 꺼내 양 손에 들고 다시 나갔다. 방에 떠돌 김형윤의 포마드 기름 냄새가 너무 싫어 방에 들어가기 싫었다. 재형은 고구마를 한 개 입에 물고 어두운 논길을 다시 걷고 있었다.'한 두 시간 더 있다가 들어갈 생각으로 걷던 재형은 저 만치 어둑어둑한 논두렁에서 움직이는 들짐승 같은 것을 보았다. 사나운 들개라도 만나면 큰 낭패인데…… 재형은 바짝 긴장한 채 어둠 속을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돌멩이를 하나 주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