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 한복판에 위치한 D&F그룹 본사.'이헌은 오늘도 잔뜩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업무에 한창이었다. 때마침 인터폰이 울리며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기분 같아서는 그냥 돌려보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내치기엔 어쩐지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혀 반갑지 않은 방문객을 들이게 했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안경을 낀 중후한 인상의 중년 신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하하, 그동안 잘 지냈나?”'중년 신사는 인사와 함께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헌의 얼굴은 그저 무표정할 뿐이었다. '‘망할 영감탱이의 충성스런 개가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지?’'그는 잘 돌아가는 머리를 재빨리 굴리며 김 변호사가 찾아 온 이유에 대해 곰곰이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이거다 싶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동안 발길을 안 하기에 좀 살 것 같더니만,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사나울 모양이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김 변호사의 얼굴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그러나 김 변호사는 그의 매서운 눈빛 공격에도 불구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유들유들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사무실에 감도는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이헌의 비서인 순곤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순곤이 권하는 의자에 앉는 김 변호사 또한 그리 유쾌한 표정만은 아니었다. 강 회장의 간곡한 청이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사무실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서로 얼굴 보는 거 피차 반가운 처지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는 이헌의 성격답게 그는 바로 핵심을 찔러댔다. 김 변호사는 닳고 닳은 느물느물한 미소를 지으며, 코끝으로 흘러내린 안경테를 천천히 밀어 올렸다.'“하하하. 자네는 어째 여전하구만. 이유야 어찌됐든 한시적이긴 하나 한 그룹의 총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빡빡해서야 쓰나. 좀 여유를 가지라고, 여유를. 하하하.”'어딜 가나 이 소리였다. 그놈의 ‘한시적’이란 말 좀 안 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기라도 한단 말인가. 김 변호사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한시적인 총수’라는 꼬리표가 그의 불편한 심기를 더욱 부채질했다.'“그런 충고라면 다른 사람한테나 하시죠? 제가 김 변호사님께 그런 충고나 들을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시답잖은 말이나 하자고 이곳까지 힘든 걸음 하신 건 아니실 텐데요. 왜요? 그 한가한 노인네가 이번에는 제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직접 가서 냄새라도 맡고 오랍디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