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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는 주인공만 되는 거 아니었나요? 4권
지은이 : 이프노즈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이프노즈, 2025
※ ISBN : 979-11-7408-304-3
※ 가격 : 2,900원
※ 발행일 : 2025년 7월 14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18화. 또 너니?
떨리는 가슴을 겨우 달랜 레이나는 황태자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시끄럽던 소리가 별안간 그쳤다.
“레이나입니다, 전하.”
그녀가 조슈아를 만나러 온다는 건, 이미 하루 전에 황궁에 알린 상태였다. 그러니 황태자도 레이나가 올 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들어와.”
퉁명스러운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해럴드가 문을 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인사를 한 해럴드가 나가려는데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 여기 있어.”
레이나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던 해럴드는 다시 문을 닫았다.
“자작이 보냈어?”
레이나가 소파에 앉기도 전에 조슈아가 물었다.
“네.”
황태자가 말을 돌리는 걸 아주 싫어하는 걸 아는 레이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 문제라면 난 할 말 없으니 돌아가.”
그는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메르헨이…… 언니가 살아 있나요?”
떨리는 음성으로 레이나가 물었다. 조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약혼녀에게 쥐새끼처럼 엿듣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그의 비아냥거림을 레이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직접 언니를 보신 건가요?”
“그래.”
조슈아는 탁자 위에 있던 검을 가리켰다.
“발칙한 게 발자크에 숨어서 저걸 만들고 있더라고.”
“아.”
검을 본 레이나는 작게 탄식했다.
정말 살아 있구나.
불안이 밀려왔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내 황후 자리는?
레이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레이나는 탁자 위에 놓인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꽤 좋아 보이는 검이었다.
자작이 메르헨을 싫어한 건 맞지만 이런 능력을 가진 걸 알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에 반해 레이나는 보잘것없는 신력을 가진 게 전부였으니까.
“공작님은요? 같이 있었나요?”
조슈아가 코웃음을 쳤다.
“던전에 들어간 놈이 무슨 수로 살아 있어?”
그의 말에 레이나는 안도했다.
‘그럼 이제 언니만 죽으면 돼.’
그녀만 없어지면 제 고민도 황태자의 스트레스도 사라질 테니까.
게다가 이미 메르헨은 죽은 사람이었다.
그때 레이나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으면서 왜 집에 오지 않은 거지?’
레이나는 조슈아의 기색을 살폈다. 제 눈치를 보는 걸 느낀 그가 표정을 구겼다.
“왜?”
“혹시 언니의 몸이 불편한가요? 아니면 기억을 잃었다든가.”
“몸은 말짱했어. 기억도 아주 잘 하고 있던데?”
“그런데도 집에 오지 않았다고요?”
“저를 죽이려는 사람들 천지인 집에 너라면 오고 싶겠어?”
“……!”
조소를 지으며 조슈아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메르헨이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차 사고가 고의였다는 것 정도는 알지 않을까?”
“그건 정말 사고였어요.”
조슈아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네 가족들은 계속 그렇게 말해야겠지.”
“정말이에요. 전하,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억울하다는 얼굴로 레이나가 항변했다. 그러나 조슈아는 이번에도 건성으로 대충 대답했다.
“알겠다고. 누가 뭐래?”
레이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무릎 위에 얹은 손을 말아 쥐었다.
조슈아는 종종 그녀와 가문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황태자비가 될 생각에 참았다. 하지만 가끔은 도무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아야 해.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어떻게 지켜 온 자리인데!
그녀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중요한 건 언니가 사라지는 거야.
이유가 뭐든 메르헨은 제 발로 수도에 나타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일이 더 쉽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에 시선을 내린 레이나는 연신 머리를 굴렸다.
‘그거야!’
갑자기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제가 언니를 만나러 갈게요.”
“네가 가서 뭐 하게? 잘 살아 있었다고 안아 주기라도 하려고?”
조슈아가 다리를 꼬며 비꼬았다.
이번에도 레이나는 제 할 말만 했다.
“전하는 언니가 수도로 돌아오길 바라시나요?”
여유롭던 황태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던전 토벌에 참가하라는 내 말을 무시한 그게 수도로 오길 바라냐고?”
조슈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와야지. 그게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비는 모습을 꼭 봐야겠어.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가 턱을 쓸었다.
“그 전에 좀 고분고분하게 만들긴 해야겠지.”
그의 답을 들은 레이나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전하의 뜻을 제가 이뤄 드릴게요.”
“좋은 수라도 있어?”
“최근에 생긴 던전 주변은 마물의 흑마법에 오염이 심각하죠. 그래서 신전에서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준비 중이고요.”
“매번 하는 일인데 그게 왜?”
“저를 남부 정화단 수장으로 보내 주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무시하려던 조슈아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정화단이 주로 하는 일은 오염된 땅의 정화 및 흑마법에 씐 자를 잡는 것이었다.
흑마법을 쓰는 마물들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정신을 망가뜨리고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예는 드물었지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레이나를 훑던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힐러였지.”
제국의 힐러는 모두 신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가 던전 토벌에 나가는 건 거의 드물었다.
레이나는 하급 귀족의 딸이었지만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그러니 그녀를 정화단의 수장으로 만드는 건 아주 쉬웠다.
안 그래도 연이은 토벌로 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수도 백성들은 이러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이럴 때 ‘마녀사냥’만큼 국민들의 결속력을 다져 줄 일도 없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마물보다는 아무래도 그쪽이 상대하기 더 쉽기도 하니까.
“좋아. 네 말대로 해 주지.”
“감사합니다, 전하.”
“대신 살려서 데리고 와.”
“하지만…….”
조슈아는 레이나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난 분명히 말했어, 레이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싸늘한 황태자의 목소리에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내로 신전에서 전갈이 갈 거야. 미리 준비해 놔.”
“네, 전하.”
레이나는 밝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메르헨을 곱게 살려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는 길에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면 돼.’
최근 남부에는 작은 던전이 빈번하게 생겼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토벌된 던전이 발자크에서 가까운 마을이었지, 아마?
그녀는 어제 신전에 갔다가 들은 신관들의 얘기를 떠올렸다.
‘맞아! 이틀 전에 울렸던 알림 마법진도 그 근방이라고 했어.’
우울했던 레이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