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Page
착한 며느리 관두고 커피 내립니다 2권
지은이 : 그린글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그린글, 2025
※ ISBN : 979-11-7408-005-9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6월 17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7. 이혼에는 돈이 필요해
에어링턴 백작저에는 남는 드레스가 많았다.
바네타가 손녀의 옷을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덕이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 옷을 갈아입은 후, 에일린은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곤 한참이나 울어 기운 없이 앉아 있는 바네타를 앞에 두고 분주히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그녀가 우리는 것은 찻잎이 아닌 새까맣게 탄 가루였다.
곧 향긋하면서 어딘가 따스한 기분이 드는 향기가 응접실에 퍼졌다.
“……처음 보는 차로군.”
여태껏 말이 없던 바네타가 마침내 입을 뗐다.
“게다가 색도 검은 것이, 정말 음용 가능한 차가 맞는가?”
“그럼요. 한 번만 시도해 보세요.”
찻잔을 들고 망설이던 바네타는, 곧 용기 내어 음료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
그녀의 붉어진 눈가가 놀란 듯 조금 팽창되었다.
그 모습을 본 에일린은 그저 살짝 웃을 뿐이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네타는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모두 비웠다.
따뜻하고 향긋한 음료를 마시니 차갑던 손과 발이 따뜻해졌다.
얼어붙었던 마음 역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커피를 모두 마신 바네타가 문득 물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다는 거, 알아요.”
에일린이 답했다.
격식을 갖추지 않은 담담한 말투.
그래서 그녀의 진심이 더 깊이 전해져왔다.
“삶을 살아가며, 때로는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니까…….”
순간 에일린의 시선이 아주 먼 곳을 향했다.
혹은 아주 먼 과거를.
멍하니 비가 잦아들고 있는 창밖을 보던 그녀가 물었다.
“비 오는 걸 좋아하세요, 바네타 부인?”
“아니.”
바네타는 즉답했다.
이어 답하는 목소리가 절로 떨려왔다.
“싫다. 비 오는 건, 너무너무 싫어.”
“제가 비가 내리는 걸 멎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러자 에일린이 담담하게 읊조렸다.
“비가 올 때 와서 말동무가 되어 드릴게요.”
“자네가, 왜……?”
“비가 그치면 공기가 무척 맑아지지 않나요? 저는 그게 참 좋더라고요.”
에일린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부인께 알려드리려고요.”
“할머니! 저는 비가 오는 게 너어무 좋아요!”
“원, 녀석도……. 무릎이나 쑤시는 칙칙한 날씨가 뭐가 좋단 말이냐.”
“헤헤. 사실은 비가 오는 것도 좋지만 다 그치고 먹구름이 가시는 그 순간이 제일 좋아요.”
에일린의 얼굴 위로, 저를 향해 해맑게 웃던 손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때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면, 꼭 모든 걸 새로 시작하는 것같이 느껴져서요!”
어느새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그쳤다.
먹구름이 가시고, 그 사이로 한 줄기 햇빛이 내려앉았다.
‘아, 그랬나.’
그 모습을 보며 바네타는 깨달았다.
릴리는 비 온 후의 이런 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었지.
그것도 잊곤 비 오는 순간마다 제 불행을 원망했다.
로사리오를 손에 꽉 쥔 바네타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손녀가 죽은 후, 너무나 오랜만에 지어보는 미소였다.
* * *
화창하게 갠 주말 오후.
에어링턴 백작저의 정원.
바네타와 테이온이 함께 테이블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쥴리안 전하께서는?”
바네타는 과거, 황실 교육을 담당했었다.
그렇기에 또래인 쥴리안 황태자와 테이온은 함께 그녀에게 교육을 받았다.
“전하께선 현재 데쿠스 왕국에 시찰을 가 계십니다.”
“그렇군. 대공께서도 분명 바쁠 텐데.”
“이런,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평소처럼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정중한 그 말에 바네타가 입매를 올려 미소를 머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도 외로운 옛 스승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테이온이 기특할 뿐이었다.
“……그 로사리오.”
그때, 테이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인이 목에 건 목걸이를 발견한 것이다.
찻잔을 기울이던 바네타가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 알아보는구나.”
겉보기엔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건 극도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성격 탓일 뿐.
사실 테이온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자상했다.
특히 한번 내 사람이라 여긴 이들에겐 누구보다 다정한 것이 바로 그였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신 물건인데…….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글쎄. 요정이 물어다 주었다.”
“……?”
알 수 없는 그녀의 대답에 테이온의 얼굴에 물음표가 스쳤다.
그러나 바네타는 그저 후후, 은은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부인의 편안한 표정.
‘하긴, 누가 구해다 주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
테이온은 안정을 되찾은 듯한 바네타 부인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알려주실 생각이 없다면, 그런 걸로 하지요.”
물론 그 입에서 나간 말은 진심과 달리 무뚝뚝했지만 말이다.
“이런, 재미없구나. 그러니 네가 그 잘난 얼굴을 하고도 평생 연애 한 번 못 한 게 아니냐.”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덕에 바네타는 대공이 된 후에도 그를 막역하게 대했다.
테이온 역시 그러한 부인의 태도를 매우 기껍게 여겼다.
다만, 방금 말한 그 내용은 좀 신경 쓰였다.
“……연애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고 해주시죠.”
“잘난 얼굴로 괜히 순진한 뭇 아가씨들 마음 설레게 하지 말고, 얼른 결혼이나 하거라.”
테이온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네타가 타박했다.
“나도 소문은 들었다. 세이리안 황녀가 널 손에 넣지 못해 아주 안달이라던데.”
“……사교계에서 잠정 은퇴하신 부인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습니까.”
테이온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그를 살피던 바네타가 슬쩍 덧붙여 물었다.
“운명을 찾는 겐가……?”
“그리 거창하고 증명되지 않은 것을 좇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대체 왜 연애를 그리 안 해.”
“저는 그저…….”
테이온이 잠시 망설였다.
순간 머릿속에 살랑이는 은발이 스쳐 지나갔다.
‘……뭐지?’
황당하게도, 그다음으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동그란 색안경이었다.
‘……미쳤군. 테이온 로데릭.’
그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곤 담담하게 말했다.
“그저, 인생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투자처를 못 만난 것뿐입니다.”
 “투자처라니. 말을 저런 식으로 하니 연애를 못 하지.”
“…….”
테이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조각 같은 외모를 더욱 빛나게 할 뿐이었다.
기가 막히게 잘생긴 모습에 바네타는 차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아이는……. 이미 혼인을 했다지.’
하필이면 근본 없는 망나니 같은 모르간스 가문의 장남과 혼인하다니.
똑똑해 보이는 아이였는데, 왜 그런 실수를 한 걸까.
‘하긴, 사랑은 인간의 눈을 가리고 때로 어리석은 선택도 기꺼이 감수하게 하지.’
자신의 손녀딸 역시 그랬었으니까.
문득,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던 그 아이의 당돌한 외침이 떠올랐다.
“그걸, 부인께 알려드리려고요.”